어떤 예술이든 그 분야에 종사하는 아티스트들에게 필요한 것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작가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식은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고,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나만의 예술'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 본연의 에너지원이 되기 때문이다.
2001년부터 '분청회화 기법'에 창안해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 차규선(52)은 특히 작가의식이 강한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그가 화가의 길을 걷게 된 배경은 필연보다 우연의 작용이 크다.
"고교 시절 동아리 활동을 위해 바둑부에 들었는데 신청 인원이 넘치자 선생님께서 '그림을 한 번 그려보라'며 미술부를 권했고 이후 그림이 제 적성에 맞았는지 1년 정도 지나자 선배들보다 더 잘 그리게 되면서 더욱 열심히 그림에 매진하게 됐습니다."
대구시 수성동 1가 도로변 건물 4층 198㎡의 화실은 차규선이 18년째 오롯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곳이다.
계명대 미술대학(87학번) 서양화과와 동대학원을 마친 작가는 1995년 대구 봉성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초창기 그는 구상계열의 사실적인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다만 그의 풍경화는 다양한 기법과 자유로운 재료 사용을 바탕으로 화면 전체에 동양 회화적 요소가 적지 않았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 지역 공모전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대학 졸업 후 화단을 보니 심사 받을 사람이 심사를 하고, 공모전의 공정성에 회의를 느끼면서 1997년 이후 그의 약력에서 공모전 수상 경력을 모두 빼버렸다. 차규선은 올해로 본격적인 화업을 시작한 지 25년째로 모두 36회의 개인전을 연 중견 작가이다.
사실 차규선은 대학시절을 회상하며 "나 스스로 둔재로 생각해 더 열심히 그림에 매진하게 됐다"고 술회하면서 "그림을 업으로 삼아 사회에 나오면서 대구의 사실적인 화풍에서 벗어나 '나만의 화풍'을 찾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그때가 1999년쯤인 걸로 기억합니다."
이른바 작가의식의 발로였다. 차규선은 이전까지만 해도 고향인 경주 내남면의 자연을 소재로 한 향수와 서정을 강조한 향토적 사실주의를 선보였다. 그러던 차에 그의 작업세계에 변화를 가져오게 된 사건은 1999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렸던 분청사기전 관람이었다.
당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를 수 있는 회화는 무엇일까?'하며 자기만의 화풍 계발에 고민하고 있던 작가는 분청사기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유레카"를 외치며 그것을 회화에 도입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분청사기 표면에 긁혀진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곡선들에게서 회화가 구현해야 할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느낀 것이다.
2001년부터 20년째 차규선이 몰입하고 있는 '분청회화 기법'은 도자기용 흙이 주재료가 되고 있다. 우선 화면에 물에 갠 도자기 흙은 밑그림으로 바른 후 분청사기의 분을 대신한 흰색 아크릴 물감으로 덧바르게 된다. 이렇게 한 후 작가가 의도하는 풍경, 즉 소나무나 고향 산천 등 조형언어를 주걱으로 긁어내거나 물로 씻어 내거나, 아니면 채색 물감을 덧발라 표현함으로써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분청회화 기법'은 아직도 회화적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여기서 또한 그의 회화 발전에 영향을 미친 두 사람의 스승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차규선은 대학 교양과정을 수강하면서 알게 된 이종문(계명대 한문교육학과 명예교수) 시조시인과는 '망년우'(忘年友'나이를 잊고 사귀는 친구사이)의 관계를 맺고 있다. 두 사람은 가끔 여행을 함께하면서 문학과 예술은 논하며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고 한다. 차규선 작품 속에서 혹은 언뜻, 혹은 긴 여운으로 남는 동양화적 정서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환담과 한시의 고즈넉한 사의(寫意)가 스며들어 있다.
이종문 시조 시인과의 사귐을 통해 차규선은 안동 갈선대를 배경으로 한 500호짜리 대작을 그리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게다가 조선후기 18세기에 시'서'화 삼절에 능했던 능호관 이인상의 그림세계를 동경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그림에 안 될 때는 조선시대 유명화가들의 작품을 보며 창작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기도 한다.
또 다른 스승은 대학 은사이기도 했던 극재 정점식 선생이다. 작가가 유품을 정리하던 중 얻은 극재의 초상화는 지금 그의 화실 벽 높이 걸려있다. 차규선은 작업을 할 때마다 스승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말하며 웃었다. 혹 세속에 영합해 작가정신이 희박해지지 않도록 늘 스승이 지켜보는 것처럼 작품 활동을 한다고 말이다.
"화가에게 개인전 횟수는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림의 수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제게 미술이외 다른 업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고 미술로 먹고사는 일이 가장 쉬웠습니다."
그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역할이 화가이기에 그림으로 세상을 향해 감동을 주고 사람들이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그는 세상이 자기를 도와주었고 그림도 사주었고 박수도 쳐주었기에 그 보답으로 사회에 기여하고픈 생각을 늘 품고 있다.
차규선은 작가정신만큼이나 포부도 크다. 그의 작품 중 유독 대작이 많은 것은 세계에 자신의 그림을 내놓았을 때 작은 그림보다 큰 그림이 주는 감동이 훨씬 풍부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작은 그림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큰 그림이 아무래도 감동이 배가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늘 예술의 근원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는 차규선은 창작의 원천을 찾아 여행을 다니고 술을 마시다가도 영감이 떠오르면 곧장 화실로 달려가 스케치하기도 한다.
지난 9년간 지역 화단에서 전시회를 열지 않았던 그가 이달 중순 대구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갖는다니 희소식임에 틀림없다.
글 사진 우문기 기자 pody2@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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