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상큼하고 날씨도 쾌청하다. 헌 옷, 책 등 필요 없는 물건들을 정리해서 버리고 산뜻하게 가을맞이 대청소를 했다. 책을 정리하다 책장 한 켠에 빛바랜 편지가 내 눈길을 끈다. 익숙한 글씨체다. "하실(河室)이 보아라. 둘째 아이를 순산하지 못해 제왕절개 분만을 하고 몸도 약한 여식을 바쁜 농사일로 산후조리도 못 해줘 미안하다. 추수해서 햅쌀 한 가마니 건영화물로 붙였다. 신유년 십일월 칠 일 아버지 씀." 내 건강을 염려하는 아버지 편지였다. 진한 그리움에 왈칵 눈물이 쏟는다.
아버지는 우리 마을과 이웃 마을을 합친 ㅇㅇ리의 이장이었다. 과묵하고 점잖아서 누구나 아버지를 좋은 분이라고 했다. 특히 마을의 어려운 일에 앞장서서 행하고 필적도 좋아 아버지가 적격이라 했다. 마을의 원로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에서도 아버지를 적극 추천하였다. 아버지는 그들의 권유를 단호히 뿌리치지 못했다.
이장을 하면서 가장 힘든 일은 비료를 사는 일이었다. 요즘처럼 필요한 만큼 직접 사서 쓰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모든 물자가 귀한 시대라 물량이 부족하여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마을에 배당된 비료를 사서 각 농가의 논마지기(평수)에 따라 나누었다. 비료를 몇 포, 몇 되, 심지어는 홉 단위까지 나눴다.
두 마을을 합쳐봐야 구십여 호 남짓 되는데 한집 한집마다 계산해야만 했다. 아버지 혼자서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보고 주판을 잘한다고 도와 달라고 했다. 평소엔 잘 도와드렸는데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 시험 기간과 겹치면 아버지께 짜증을 내기도 했다. 비료를 사는 날엔 온 동네 사람들이 소 등에 비료를 싣고 와서 우리 집 마당에다 내려놓고 나누었다. 일 년에 몇 번씩 그런 작업을 했다.
이장의 할 일이 본연의 업무보다 잡다한 업무들이 더 많았다. 면사무소 가시는 날엔 동네 사람들 일을 아버지가 대신해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 편지도 읽어주고 답장까지도 써 줬다. 마을 사람들은 무언가 의논할 일이 있으면 우리 집 사랑채에 수시로 들락거렸다. 손님들이 오면 대접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식사 때 찾아와도 어머니는 잽싸게 술상을 차려야 했다. 그렇다 보니 누룩도 만들고 술 단지가 빌 날 없이 술을 빚느라 분주했다. 어머니도 농사일로 바쁘고 손님 대접도 힘든데 아버지는 왜 굳이 그 일을 하는지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동네일 하느라 우리 집 일은 늘 뒷전으로 밀리고 때론 남의 일손을 빌리기도 했다. 파종 시기, 모내기, 가을 추수 등 농사가 제일 많은 집보다 더 늦게 끝나 항상 동네에서 꼴찌였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농사 시기를 놓친다고 동동거렸다. 어머니가 소득 없는 일 그만하라고 만류해도 오랫동안 아버지는 그 일을 했다. 이장일에 밀려 집안일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천하태평이라며 답답해했다.
자식들을 나무라거나 때리는 일도 없었지만, 자상하거나 정을 주지도 않았다. 중학교 때 다리를 다쳐 아버지 등에 업혀 한의원에 침 맞으러 간 일이 있었다. 아버지 품에 안기거나 업혀본 기억이 없어 겸연쩍고 어색해 머뭇거리며 거리를 뒀다. 울퉁불퉁 산길에서 힘이 들어 아버지 등에 몸을 밀착시켰다.
"와 이래 말랐노. 밥 좀 마이 무라"며 나를 한번 추켜올려 업었다. 양손으로 바짝 감싸준 아버지 등은 정말 넓고 포근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문구사에 들러 종이를 사는 동안, 그때 인기 있는 월간 학생 잡지 '학원'을 내가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사주셨다. 뜻밖의 선물에 하늘을 나는 듯 기뻤다. 친구들이 번갈아 빌려가며 모두 얼마나 재미있게 읽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붓글씨를 잘 썼다. 자녀들 혼사 치를 때 보내는 사성도 써 주고, 한옥을 지으면 상량을 얹는데 거기에도 큰 붓으로 글씨도 썼다. 자세히는 몰라도 한자로 ○○년 ○월 ○일이라는 날짜도 적어 넣은 것 같다. 긴긴 겨울밤 어머니가 즐겨 읽던 춘향전, 유충열전, 사씨남정기 등의 고전소설은 아버지가 두루마리에 필사해 놓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시집와서 아버지한테 글을 배우셨다고 했다. 유품인 그 두루마리 몇 편을 골동품처럼 나는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이 년 조금 안 되어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셨다. 돌아가시기 전 칠 개월 정도 꼼짝도 못하고 누워 계시는 병실을 내가 지켜야 했다. 어머니에게 의지했듯 나에게 기대는 그런 아버지가 쓸쓸해 보였다. 애잔하고 가슴이 먹먹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순간순간 차라리 일찍 돌아가셨으면 하는 그런 못된 생각도 했다.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 어눌한 발음으로 제일 먼저 미국에 사는 동생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는 이제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멀리 있는 자식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말이 없고 표현도 잘 안 해서 우리들한테 정도 없는가 했는데···….
그 시대 아버지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누라, 자식 자랑하면 팔불출이고 체통 없는 사람이란 고정관념이 있어, 내색을 안 했을 뿐이지 마음은 더 따뜻했으리라. 그땐 아버지를 다 이해 못 했었다. 말보다 몸으로 실천하신 아버지를 이제야 조금 알 듯하다. 이웃을 생각하고 배려와 봉사할 줄 아는 마음 넉넉한 분이라 생각된다. 아버지한테 업혀 침을 맞고 오는 길에 잡지(학원) 선물 받은 그 날이 떠오르며 빙그레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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