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제칼럼] 10조2천억 對 1천500억 전쟁에서

양진영 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이사장

양진영 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이사장
양진영 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이사장

10조2천억 원(86억 달러) 대 4조6천억 원.

이 숫자는 각각 화이자의 연간 연구개발(R&D) 투자 비용과 대한민국 첨단의료복합단지의 30년 사업비다.

4조6천억 원은 지난 2009년부터 오는 2038년까지 30년간 국내 첨단의료복합단지에 투입되는 정부 예산이다. 이를 30분의 1로 나누면 수치상으로 1년에 1천500억 원의 R&D 예산이 투입된다. 심지어 이는 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과 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양측이 나눠 갖는 예산이다.

화이자와 국내 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이 매년 사용하는 예산을 단순 계산하면 10조2천억 원 대 1천500억 원의 경쟁이다. 화이자 1개 기업은 첨단의료복합단지 68배 예산을 R&D에 투자하는 셈이다.

신약 개발은 통상 10~15년, 1조~2조 원의 시간과 비용이 든다고들 얘기한다. 성공했을 때 이득은 크지만, 투자 금액 대비 성공 확률이 높지 않다는 점이 의료계 R&D의 문제다.

신약 개발 중 분자모델링의 경우 성공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 9천999번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야 1번 성공하는 셈이다. 웬만한 각오로는 덤비기 힘든 분야다.

그러다 보니 거대 기업이어야 연구개발 투자를 하고, 투자한 기업에서 성과가 나오니까 개발도 독점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한민국이 정부 주도의 클러스터를 대구에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기업에 R&D 투자를 강요할 수 없으니, 정부가 장비와 인력을 갖춰 놓고 기업이 성공할 때까지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투자되는 금액이 바로 4조6천억 원이다.

화이자의 68분의 1 예산을 가지고 고군분투 중이니 무조건 기다려 달라는 뜻으로 시작하는 글은 아니다. 대한민국 예산에서 큰 금액을 의료산업에 투자하기로 해준 식견 있었던 분들께 감사하고 있음을 미리 밝힌다. 4조6천억 원은 엄청난 금액이고, 덕분에 재단은 고급 장비와 우수한 인력을 확보했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무찌른 명량대첩 이후로 1대 68의 대결쯤은 애국심으로 이겨야 하는 열정의 나라가 아닌가. 다만 열정으로 무장하더라도 1대 68의 싸움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얘기는 하고 싶다.

왜 서두에 화이자와 대한민국의 연구개발비를 비교했을까?

화이자는 의료 R&D 투자가 제일 많은 기업이 아니다. 더 많은 연구비를 투자하는 로슈나 존슨앤존슨과 비교하면 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은 더 왜소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굳이 화이자와 비교하고 싶은 이유가 있다.

불과 몇 달 전, 대한민국은 코로나19 백신 물량을 확보하려고 화이자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당시 이에 총동원된 기관 소속이었기 때문에 아픔이 더 오래 남았다.

국민의 안전을 담보로 하면 하나의 기업이 하나의 국가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섭기도 했다. 이런 일이 또다시 반복돼선 안 된다는 것이 당시의 결심이었다.

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이사장으로의 도전을 결정한 것도 그런 오기가 어느 정도 반영되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한강의 기적으로 산업 발전을 이뤄낸 대한민국, 이제는 '케이'(K)의 기적으로 의료 발전을 이뤄내야 한다.

10년 뒤 예상 못 한 전염병 사태가 발생했을 때 또 화이자를 만나기 위해 찾아갈 것인가, 미국이 찾아오면 번호표를 줄 것인가. 그것은 지금 우리의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

정부는 의료산업 R&D 투자 비용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계산하고, 조성된 클러스터의 성공에 집중해야 한다.

R&D 예산 쪼개기로는 신약 개발이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을 조성해 놓고, 건물을 올린 지 8년 만에 조급증을 내고 R&D 예산을 흩뿌리려 해서는 안 된다.

의료산업의 경쟁자는 국내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유럽과 미국이다.

대한민국이 의료 강국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는 지자체끼리 경쟁을 붙일 것이 아니라, 국내 산업을 육성해줄 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을 이용해야 한다.

다음으로 국민은 1대 68의 전쟁을 승리로 바꾸려 노력하는 과학자들을 응원해주길 바란다.

우리의 어머니, 우리의 아들을 치료해줄 신약과 의료기기를 만들겠다는 희망으로 400여 명의 연구원은 오늘도 고민하고 있다. 국민의 관심이 모여야 의료산업에 대한 정책을 만들고 메디컬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

'케이메디허브'로 CI를 변경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을 주목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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