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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새해, 서예에 빠져볼까요

정태수 서예가

정태수 서예가
정태수 서예가

"물에 빠지면 벗어날 수 있지만 서예에 빠지면 살아남을 수 없다"

캐나다 출신으로 '중국미술사'를 저술한 마이클 설리번이 한 말이다. 그는 일생 동안 동양미술의 매력에 빠져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남겼다. 실제 중국에서 서예를 접하였고 그 오묘한 멋을 체감한 뒤 동아시아 미술의 기반은 서예라고 설파하면서 서예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설리번이 푹 빠졌던 서예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추상성이다. 미국의 미학자 MH 에이브람스는 '거울과 램프'에서 고전적인 재현예술을 거울에, 현대예술을 램프에 비유했다. 고대예술이 거울에 비치듯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중시했다면, 현대예술은 작가의 감정과 의도를 자연스럽게 추상적으로 표현한다고 주장했다.

서예는 문자를 소재로 작가의 정감을 담아내는 추상예술이다. 초기 문자에는 약간의 상형성이 남아있었으나 여러 서체로 분화되면서 상형성은 사라지고 추상적인 점획으로 구성된 문자만 남게 되었다. 그렇기에 서예는 어떤 예술보다 추상성이 앞선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한나라 때 양웅이란 사람은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한 마음은 관념이면서 감정이다. 그것이 서예로 표현되면 정감이 발현된 추상이 된다. 서예의 점획에는 구체적인 사물 형태의 묘사보다 작가의 마음을 담아낸 추상성이 농축되어 있다. 이런 서예의 추상성을 자신의 작품에 적극적으로 응용한 작가들이 피에르 술라즈, 마크 토비, 그레이브스, 프란츠 클라인 등 서양의 추상화가들이다. 서양의 작가들이 서예의 추상적 가치를 알아보고 활용한 셈이다.

또 하나의 매력은 일회성이다. 서예작품은 완성된 뒤 다시 붓을 댈 수 없다. 시는 글자를 더하거나 뺄 수 있고 그림은 수정할 수 있지만, 서예는 원천적으로 불가하다. 당나라 한유가 장욱의 초서를 보고 '일우우서'(一寓于書:하나같이 글씨에 맡김)라고 말했다.

여기서 일(一)은 희, 노, 애, 락, 하늘, 땅, 바람, 비 등 온갖 변화의 요소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곧 순식간에 작가의 사유를 한 획에 담아내야 하는 게 바로 서예의 일회성이다. 이런 일회성을 얻기 위해서는 오랜 수련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서예가들은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한다.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서예 애호가였다. 그가 스탠포드 대학 연설에서 서예를 공부한 소중한 경험을 강조하면서 말했다. "만약 제가 서예 수업을 청강하지 않았다면 PC들은 오늘날의 아름다운 서체들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잡스처럼 갈구하며 도전하면 머지않아 마음을 담아낸 일획을 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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