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영화 ‘더 배트맨’

영화 '더 배트맨'의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더 배트맨'의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배트맨은 슈퍼히어로 중에서 다크한 분위기로는 단연 최고다. 검은 슈트에 밤에만 나다니는 박쥐인간이라는 정형화된 이미지 외에 그에게는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슬픈 트라우마도 있다. 그래서 밤만 되면 잠을 잊고, 범죄자를 응징하며 고담시의 영웅 아닌 영웅으로 살아간다.

'더 배트맨'(감독 매트 리브스)은 그런 배트맨이 더 어둡고 침울하며 고통스러워졌다. 그동안 슈퍼히어로 영화가 가지고 있었던 경쾌함은 사라지고, 관객을 3시간 가까이 배트맨의 고뇌 속에 집어넣고 고담시의 검은 비에 흠뻑 젖게 한다.

시장 선거를 앞둔 고담시의 현직 시장이 살해당한다. 테이프로 감긴 안면에는 '거짓은 이제 그만'(No More Lies)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고담시의 고위층들이 잇따라 살해되면서 배트맨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배트맨(로버트 패틴슨)은 살인자를 추적한다.

영화 '더 배트맨'의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더 배트맨'의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더 배트맨'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 이후 10년만의 귀환이다. 시기적으로는 배트맨 개업(?) 2년 차. '배트맨 비긴즈'(2005)의 직후 정도일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시리즈 3부를 매트 리브스 감독 버전으로 되돌린 것이다. 그 또한 3부작 연출 예정으로 이번이 첫 번 째 작품으로 '더 배트맨'이 배트맨 서사의 리스타트이다.

흥미롭게 '더 배트맨'은 탐정물의 플롯을 가지고 있다. 잇단 살인이 일어나고 배트맨이 범인을 쫓으면서 고담시의 추악한, 그리고 웨인 가문의 어두운 과거를 알게 되는 것이다. DC코믹스가 처음 등장한 이래 가장 낯선, 히어로가 아닌 탐정으로서 배트맨을 만나게 된다. DC가 1937년부터 출판된 '탐정만화'(Detective Comics)의 이니셜이란 것을 감안하면, 초심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뿌리 찾기의 의지일까.

브루스 웨인이라는 캐릭터부터 그랬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산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초보(?) 배트맨으로 첨단 장비도 없다. 오직 검은 슈트에 육중한 주먹질로 악당과 맞선다. 집사 알프레드(앤디 서키스)와 갈등도 있고, 형사 고든(제프리 라이트) 또한 반장 진급을 못했다. 셀리나(조 크라비츠)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열혈소녀로 아직 '캣우먼'이란 이름도 받지 못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시리즈에서 브루스 웨인(크리스천 베일)은 다소 거만한 인상을 주었다. 자신이 물려받은 부를 과시하면서 능력 또한 과신한다. 그러나 매트 리브스의 버전에서 브루스(로버트 패틴슨)는 자책감, 죄책감, 상처, 아픔 등 심리적으로 가장 어두운 지점의 한가운데 있다.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어두운 자아 속에 허덕인다.

그 흔한 스펙터클 액션도 거의 없다. 배트모빌로 악당을 쫓을 때 벌어지는 고속도로에서의 카체이스가 고작이다. 그럼에도 '더 배트맨'은 놀라운 긴장감을 던져준다. 일찍이 슈퍼 히어로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서사극의 응축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 배트맨'의 시기적 배경으로 보면 브루스의 배트맨 캐릭터는 미완이다. 초보 2년차, 스스로 자신을 제어할 수 없고, 늘 분노에 휩싸여 있다. 그래서 "두려움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라며 집사에게 하소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의 앞에는 거대한 운명이 서서히 다가온다. 히어로의 운명이다. 내면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는 그림자가 돼야 했다. "내가 바로 그림자다." "내가 바로 복수다."

영화는 그런 배트맨의 내면을 치열하게 그려낸다. 서서히 영웅으로 탄생하는 힘 축적의 과정이다. 마치 악당을 마주한 배트모빌이 터보엔진의 RPM을 올리며 예열하는 순간처럼 말이다. 뜨겁게 달궈진 쇳덩이에 차가운 비가 내리면서 거친 수증기를 뿜어낸다.

영화 '더 배트맨'의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더 배트맨'의 한 장면.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배트맨의 어두운 표정처럼 영화의 색감도 어둡다. 명암비가 약한 스크린으로는 관람하기 힘들 정도다. 거기에 비까지 쏟아지니 극장 안이 장마철처럼 눅눅해진다. 촬영도 심도가 얕은 클로즈업에 주변부의 포커스가 날아가는 렌즈를 써 배트맨의 일그러진 감정을 잘 그려내 주고 있다.

특히 음악이 이런 분위기를 잘 고조시킨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흐르는 '아베 마리아'는 종교적 장엄미로 배트맨의 비장미를 더해준다. 브루스가 고뇌할 때 흐르는 애절한 첼로와 액션 장면에 흐르는 신경 곤두세우는 오케스트라는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흡입시킨다. '코코'(2018),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2019), '조조 래빗'(2020) 등 해가 거듭할수록 빼어난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는 마이클 지아치노의 재능이 빛난다.

슈퍼히어로 영화의 거대한 액션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다소 심심할 수도 있다. 플롯이 그렇고, 서사가 그렇고 연출이 그렇다. 그러나 브루스의 고뇌 속에 빠진다면 아주 새로운 히어로물의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히어로 영화면서 탐정물의 서스펜스와 멜로의 알싸함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더 배트맨'은 통속에 머물지 않는, 부단히 노력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진가를 느끼게 하는 히어로 영화다. 176분.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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