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닷새마다 부는 꽃바람

정태수 서예가

정태수 서예가
정태수 서예가

"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 오늘아침 바람에 꽃이 떨어지네."

봄날 순식간에 피고 지는 꽃을 보면서 조선의 송한필이 읊조린 한시 '우음'(偶吟)의 한 부분이다. 봄꽃은 긴 겨울을 이겨내고 피지만 짧은 순간 피었다가 아쉽게 떨어지고, 이어서 다른 꽃이 또 피고 진다.

옛사람들은 소한부터 곡우까지 닷새마다 꽃을 피우면서 꽃소식을 전하는 꽃바람이 스물네 번 불어온다고 해, 이를 이십사번풍(二十四番風), 혹은 화신풍(花信風)이라 했다. 닷새에 한 번씩 스물네 번, 120일 동안 이어지다 곡우가 되면 봄이 가고 여름이 시작될 즈음 마지막 화신풍이 분다.

북송의 주휘(周煇)는 '청파잡지'(清波雜志)에서 "초봄부터 초여름까지 스물네 번 화신풍이 부는데 가장 먼저 매화풍이 불고, 가장 늦게 연화풍이 분다"고 적고 있다. 화신풍의 순서는 매화‧산다(山茶)‧수선‧서향(瑞香)‧난화(蘭花)‧산반(山礬)‧영춘(迎春)‧앵도(櫻桃)‧망춘(望春‧)채화(菜花)‧행화(杏花)‧이화(李花)‧도화(桃花)‧체당(棣棠)‧장미‧해당(海棠)‧이화(梨花)‧목란(木蘭)‧동화(桐花)‧맥화(麥花)‧유화(柳花)‧목단‧도미(酴釄)‧연화(楝花,멀구슬나무 꽃)이니 참으로 운치있는 가름이다.

닷새마다 새로운 화신풍이 불어오는 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까.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지에서 지은 시 '산행잡구'(山行雜謳)에서 "봄을 붙잡아 둘 계교 없으니(無計留春住)/오는 여름 맞이할 수밖에(何如迎夏來)"라는 싯귀를 통해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석춘(惜春)의 마음을 드러냈다.

당나라 두보는 지는 꽃을 아쉬워하는 '가석'(可惜)이란 시에서 "꽃잎은 무엇이 급해 저리 빨리 날리는가(花飛有底急)/ 늙어가니 봄이 더디기를 바란다네(老去願春遲)"라는 옥구에서 가는 봄을 아쉬워한다.

이렇듯이 다산과 두보는 봄이 더디게 가길 바라는 마음을 노래했지만, 잠깐 사이에 지나가는 게 자연의 이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처럼 아무리 화려한 꽃도 열흘간 붉게 피어있지 못하고, 우리네 삶도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니 석춘(惜春)의 심정은 다산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

필자가 우거하는 일손재(日損齋)의 춘란은 어지러운 세파에 물들지 않고 올해도 어김없이 해맑은 꽃을 보여준다.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는데 고운 속살을 드러내니 반갑기 그지없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곁에 두고 바라볼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춘란의 은은한 화신풍에 봄날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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