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들의 경주, 그곳에 가고 싶다] <4>경주의 바다-가자미

새벽 여는 감포항, 경주는 '가자미 천국' 이다
경주 지척 날것 그대로 '신라 바다' 존재…문무대왕릉 인근 무속인들 끊이지 않아
'처용·석탈해·장보고' 숨결까지 담은 듯

감포항 인근 해안가에는 가자미를 말리는 덕장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가자미 덕장너머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감포항 인근 해안가에는 가자미를 말리는 덕장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가자미 덕장너머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다.

그곳에 바다가 있었다. 시내와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푸르디푸른 바다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불국사에서 20여분, 시내에선 35분 만에 감포에 닿았다. 부산바다처럼 번잡하지 않고 서해바다처럼 눅눅한 느낌 전혀 나지 않으면서 날것 그대로의 느낌이 물씬한 바다가 거기 있었다. 감포(甘浦)다.

감포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울산이고 위쪽으로는 구룡포다. 그 울산바다에 조금 못 미치는 지점에 상서로운 기운이 솟아나오는 바다가 있다. 문무대왕의 기운을 받으려는 무속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바다도 그곳에 있다. 밤새 파도소리 철썩거리는 지상 최고의 '주상절리'가 매혹하는 '해파랑길', '파도소리길'도 경주에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경주는 수많은 고분이 살아있는 고도(古都)이자 불국사와 첨성대 등 신라천년의 유적이 트레이드마크화된 도시다. 경주에서 바다를 떠올리는 기회는 '문무대왕암' 정도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만나는 경주바다는 부산 바다와 달랐고 강릉 바다와도 달랐다.

동해바다이면서 경주바다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그곳엔 다른 바다가 담고 있지 않은 '천년의 역사'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동해 용왕이 돼 나라를 지킨 문무대왕의 기상이 묻어나는 바다이자 신라의 흔적이 물씬 풍기는 바다이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경주바다는 '처용'의 바다이자 (석)'탈해'의 바다, 페르시아 왕자의 바다였고 해상왕이라 불린 '장보고'의 숨결까지 담고 있는 바다이기도 했다.

경주의 바다는 신라의 바다다. 삼국통일 후 경주는 동방 최대의 국제도시로 각광을 받았고 수많은 국제무역상들이 바다를 통해 경주에 왔다. 경주에 그런 바다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마치 천년신라를 잊고 있듯이...

감포항 수협 어판장에서 가자미 경매가 이뤄지고 있다.
감포항 수협 어판장에서 가자미 경매가 이뤄지고 있다.

◆감포항의 새벽

해가 뜨기에도 두 시간여가 남은 새벽 다섯 시에 못미치는 시각. 천년의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은 거친 어부의 일상은 항구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감포항은 이미 크고 작은 어선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새통이었다. 며칠간의 조업을 마치고 돌아와 '만선'(滿船)의 표식으로 부려놓은 가자미와 대구 생태상자들로 수협 어판장은 이미 가득찼다.

태풍이나 파도가 센, 궂은 날 외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새벽마다 열리는 어판장이다. 경매시작을 알리는 사이렌소리와 더불어 경매사는 요령을 흔들었다. 경매사는 중매인 한 사람 한 사람 손가락을 확인하고는 낙찰자를 결정했다. 순식간에 경매는 끝났고 경매사는 요령을 흔들어대면서 곧바로 다음 상자로 발길을 돌렸다. 감포항의 새벽은 그렇게 열렸다.

감포항 수협 어판장에서 가자미 경매가 이뤄지고 있다.
감포항 수협 어판장에서 가자미 경매가 이뤄지고 있다.

홍역을 치르듯 한바탕 경매가 끝난 어판장은 경매가 끝난 상자들을 실어가려는 트럭들로 다시 부산해졌다. 여전히 아침 해는 뜨지 않았고 감포항은 다시 적막해졌다.

감포는 '가자미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매에 오른 생선상자의 절반 이상이 가자미다. 물오른 대구와 생태 그리고 울릉도근처에서만 잡히는 홍문어 등도 간혹 보이지만 어판장에 부려놓은 나무상자를 가득 채운 건 가지미였다. 여느 항구 어판장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가자미 천국이었다.

경주를 비롯한 동해안의 포구에서는 흔하디흔한 생선이 가자미지만 요즘 가자미 시세는 꽤 올랐다. 그렇다고 이제야 대접받는 것은 아니겠지만 고래가 살던 경주바다를 지키면서 독차지한 가자미들의 세상이 도래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자미는 지천이다.

포구를 돌아나오자 오래된 항구의 좁은 골목길을 지키고 있는 적산가옥들이 포구의 역사를 대신하는 듯 했다. 감포항은 일제 식민지시대인 1920년 인근 구룡포항, 울진 죽변항과 함께 개항한 동해남부의 중심어항이었다. 개항 100주년이 넘은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건 아직도 그 골목을 지키는 적산가옥들이었다.

감포는 '가자미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포시장 어물전 가자미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감포는 '가자미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포시장 어물전 가자미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경주는 가자미도시다.

가을 들어 살이 통통하게 오른 가자미가 제철을 맞았다. 해안가 덕장에선 해풍에 꾸덕꾸덕 말리는 생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 가자미다. 꽁치와 청어를 대량으로 말리는 구룡포의 '과메기'덕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영덕이나 울진에 들어서면 거대한 대게조형물이 반겨준다.

감포에선 올 들어 처음으로 '가자미축제'가 열리기는 했지만 인위적인 가자미 조형물 대신 가자미덕장이 경주가 가자미의 본고장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사시사철 불어오는 해풍과 아침 햇살에 말려 꾸덕꾸덕해진 가자미는 구워먹어도 좋고 튀겨먹어도 좋고 조림으로 먹어도 맛있다.

그래서 감포 어느 식당에 가더라도 제철을 맞은 가자미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물론 넙치과에 속하지만 광어나 도다리처럼 대접을 받지못하는 가자미지만 회로 먹어도 가자미는 맛있다. 서울에서는 생소한 '미주구리회'가 바로 가자미회다. 미주구리는 경주 뿐 아니라 7번 국도를 따라 이어지는 영덕과 울진 그리고 강원도사람들에게도 친숙하다.

동해안에서 가장 많이, 흔하게 잡히다 보니 가자미는 예전부터 귀한 대접을 받는 생선이 아니었다. 대구와 굴비 등 귀한 생선은 물론이고 과메기도 임금에게 진상됐지만 가자미는 그런 진상품에 끼지도 못했다.

감포항에 해가 떠오르자 어부들이 출어를 준비하고 있다.
감포항에 해가 떠오르자 어부들이 출어를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서민들이 즐겨찾는 대폿집에서 가장 인기있는 안주거리였고 서민들의 밥상에 매일 오르는 단골반찬거리였다. 회로 썰어서 '미주구리회'로 먹었고 물회나 물회국수의 주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횟감으로 썰어 양파와 깻잎, 풋고추 등과 함께 초고추장을 넣어 무치면 고소한 맛이 돋보이는 '무침회'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물론 적당히 말린 가자미를 숯불에 굽는다면 비린내와 잡내가 전혀 나지 않는 최고의 생선구이가 된다.

경주사람들은 그런 가자미를 지독하게도 사랑했다. 신라왕들이 사랑했고 신라사람 누구나 가자미를 먹었다. 그때부터 경주에서 가자미조림이 유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경주에선 다른 지방과 다른 방식의 가자미요리가 다양하다. 가자미요리의 완결판은 경주식 가자미식혜다. 흔히 가자미식혜는 함경도 등 이북지방에서 주로 만들어 먹던 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경주에서도 오래 전부터 가자미식혜를 즐겨먹었다.

감포 공설시장에서 꾸덕하게 말린 가자미 한 광주리를 샀다. 해안가 덕장에서 일주일 정도 해풍을 맞으며 잘 건조시킨 가자미였다. 알이 밴 듯 탱탱하게 살이 오른 참가지미는 구워도 맛있고 조림을 하거나 찜을 해도 맛있고 자작하게 기름을 치고 튀겨먹어도 맛있다. 고등어나 꽁치 청어와 달리 어떻게 요리를 해도 비린 맛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이 경주가자미다. 한 끼에 두세 마리씩 요리해서 먹더라도 일주일은 충분히 먹을 양이었다.

뱃사람들은 이른 새벽 허기를 달래기 위해 포구에 자리 잡은 새벽식당 메뉴들.
뱃사람들은 이른 새벽 허기를 달래기 위해 포구에 자리 잡은 새벽식당 메뉴들.

◆포구의 맛

어판장이 파하면 뱃사람들은 이른 새벽 허기를 달래기 위해 포구에 자리 잡은 새벽식당으로 향한다. 연탄화덕 위에서 졸고 있던 냄비에선 막대 어묵들이 반겨주고 어묵 익어가는 냄새가 시장기를 더해준다. 그렇다고 어묵만 먹고 새벽을 달래기는 역부족이다. 실비식당 주인장은 새벽대포 한 잔 보다 더 달콤한 술이 보약이라며 술 한 잔을 권했다. 못이기는 척 대포 한 잔을 받아들었다. 감포항의 새벽을 깨운 어부들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감포항이 동해안 남부지방에서 제일 잘나가던 시절, 어판장 주변에는 새벽식당이 꽤나 많았을 것이다. 지금은 포구실비와 현대식당 등 두어 곳 밖에 새벽에 연 식당이 없다. 아직 추위가 닥치지 않은 새벽한기는 '롱패딩'정도로 견딜 수 있지만 새벽허기는 참을 수 없었다. 압력솥에 올려놓은 밥 짓는 냄새가 시장기를 더 했다. 콩잎과 깻잎 장아찌가 밑반찬으로 올라온 지 10여분. 도루묵찌개와 가자미튀김이 상에 올라왔다.

가자미 요리는 다양하다. 가자미를 회로 썰어서 만든 '미주구리회'
가자미 요리는 다양하다. 가자미를 회로 썰어서 만든 '미주구리회'

평생 감포항을 지켜 온 백전노장 어부들이 출근하듯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서는 대폿잔을 들이킨다. 포구의 새벽은 가자미를 구워내고 도루묵찌개를 끓여내는 냄새로 농익어갔다.천년을 이어 경주바다를 지켜 온 가자미를 통해 우리는 신라천년의 애환도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새 중천까지 떠오른 햇살에 다시 출항을 준비하는 어부들로 감포항이 다시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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