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형산강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
1950년 9월 18일 새벽. 한국군 제3사단 23연대 대원들로 편성된 소규모 특공대가 눈을 번뜩였다. 작전의 핵심은 속도. 빠르게 강을 건넌 이들은 부대 이동이 가능한 길목을 찾아 움직였다. 22연대와 23연대 대원들은 자세를 낮춘 채 특공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도하 신호가 울렸다. 2개 연대는 특공대가 열어놓은 길로, 26연대는 형산강 다리로 목숨을 건 전투에 뛰어들었다.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전우들이 쓰러져갔지만 이 작전의 중요성을 아는 대원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새벽 4시쯤 시작된 도하 작전은 작전 구역 일대 형산강을 모두 붉은 피로 물들인 낮 12시가 돼서야 끝났다.
작전은 승리였다. 승기를 잡은 한국군은 군사 요충지인 포항을 탈환하고 파죽지세로 북한군을 몰아붙였다.
대대적 반격에 나선 한국군은 9월 23일부터 30일까지 그대로 북진해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서 영덕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강릉지역을 수복했다. 제3사단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0월 1일 현재의 38선을 넘어 북으로 치고 올라갔다.
한국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완벽하게 전환한 이 전투의 이름은 '형산강 전투'다.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형산강 일대에서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벌어졌다.
형산강은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한국군과 미군이 '배수의 진'을 친 낙동강 방어선의 동쪽 시작점이다. 동쪽 포항에서 칠곡을 거쳐 남쪽 경남 마산까지 역 'ㄱ'자로 방어선이 그어졌다. 이 방어선은 '워커 라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방어선을 그은 월턴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년 12월 3일~1950년 12월 23일) 장군의 이름을 땄다.
이곳이 뚫리면 경주와 울산, 부산까지 북한군에 순식간에 점령당할 수 있었기에 한국군은 사활을 걸고 싸웠고, 끝내 이겼다.
◆형산강 전투의 서막
포항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에서 15일 정도가 지난 후 북한군을 처음 맞닥뜨렸다.
북한군 조선인민유격대를 상대로 한 첫 전투는 포항시(당시 영일군) 북구 죽장면 상사리 구암산에서 치러졌다.
이 전투는 승리했지만 위태위태한 상황이 이어졌다. 당시 북한은 제5사단, 제766유격대, 제945육전대 등을 동해안과 태백산지에 투입하는 등 동부축선을 따라 남침 중이었다. 북한군은 최단기간 부산을 점령하겠다는 목표로 무서운 속도로 남하했다.
이를 구암산에서 가로막은 한국군은 제3사단과 해군 포항경비부, 해군 함정 등이었다.
포항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도시였다. 최후의 보루 낙동강 방어선인 데다 포항의 영일만은 상륙작전을 펼치기 좋은 곳이다. 영일비행장(현 포항경주공항)도 갖추고 있어 군수품과 병력을 아래로 부산, 위로는 대전까지 신속하게 이동시키는 데에 이보다 최적의 장소가 없었다.
이런 이점에 미군도 1950년 7월 18일~22일 포항상륙작전(작전명 블루하트)을 통해 미제1기병사단, 제25보병사단, 제27연대 병력 등을 포항에 상륙시켜 전선에 투입했다.
한국군은 8월 5일부터 19일까지 포항시 북구 죽장면 보현산 일대에서 벌어진 '죽장 보현산 수석봉 전투'에서도 북한군에 승리를 거뒀다.
보현산 일대는 험준한 산악지대여서 방어 작전에 매우 유리했다. 포항으로 진입하는 도로가 있기도 해 한국군으로선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을 지키던 한국군 제3사단이 영덕지역 전시 상황이 나빠져 지원을 간 틈을 타 북한군766부대가 보현산과 죽장 구암산 일대로 파고들어 거점을 잡았다.
766부대는 해군 포항경비부 육전대와 경찰 대대의 협공에 세력이 약해지는 듯했지만, 북한군 제12사단과 합세한 뒤 반격하면서 전세가 또 뒤집어졌다.
이후에도 보현산을 중심으로 전세가 수차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한국군의 기습 작전이 먹히면서 766부대를 괴멸시키는 등 악전고투 끝에 승리했다.
◆빼앗긴 군사 요충지 포항
하지만 이 전투의 승리에 한국군은 기뻐할 수는 없었다. 계속된 치열한 전투로 병력이 크게 줄어들면서 훈련이 덜된 학도병을 전선에 배치해야 하는 상황에 닥쳤다.
8월 9일 육군본부는 학도병이 대부분인 제25연대를 급히 편성해 포항에 배치시켰고, 이 중 3대대 9중대는 포항시 북구 우현동 소티재로 이동해 북한군의 남하를 대비했다.
이곳은 흥해에서 포항을 가거나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해 포항 방어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았다.
그러나 북한군이 8월 11일 0시쯤 이곳에 화력을 집중하면서 전투 3시간 만에 전선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 '소티재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부대원은 전체 180명 중 160명으로, 여기에 소속된 학도병은 전원 숨졌다. 이들은 포항고, 동지고, 포항수산고(현 포항해양과학고) 학생 등 포항 출신들이었다.
이 전투는 '포화 속으로'라는 영화로도 기록된 '포항여자중학교(이하 포항여중)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의 전투였다.
소티재 전투가 벌어질 당시 포항여중에선 서울에서 내려온 학도병 71명이 상황을 지켜보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들 학도병은 소티재를 넘어 포항으로 진입하는 북한군을 11시간 동안 네차례나 막아냈다. 탄약이 바닥나고 백병전까지 벌어졌다. 북한군은 학교 담장을 넘어 밀고 들어왔지만 학도병들은 모두 쓰러질 때까지 싸웠다. 이 전투로 학도병 중 48명이 전사했고 13명은 포로로 붙잡혔다.
승기를 잡은 북한군은 계속 남하하자 그대로 포항을 내줄 수 없었던 한국군은 포항 전역에 포격을 명령하면서 지역을 폐허로 만들었다. 건물을 그대로 두면 북한군의 주둔지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북한군은 포항에 주둔하지 않고 포항에서 북쪽으로 이동했다.
한국군은 그 틈을 노려 8월 15일 영천에서 전투 중이던 '민기식 부대'에게 '포항 탈환' 명령을 내렸고 무혈 탈환에 성공했다. 민기식 부대는 북한군을 쫓아 올라가며 추격하는 형태를 띠게 됐다. 이어 8월 22일에는 북한군을 포항 북쪽으로 완전히 밀어내면서 흥해평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천마산 삿갓봉고지를 탈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9월 5일 삿갓봉은 북한군 5사단과 인접 사단의 공세로 다시 내어주게 됐다.
삿갓봉 전투는 한국군과 북한군이 혈전을 벌인 가장 치열했던 전투현장이다. 8월 17일 전투가 시작된 이후 20일간 고지 주인이 16번이나 바뀌었다. 뺏고 뺏기는 공방전에서 산은 붉게 물들었고, 시신이 산처럼 쌓였다. 이를 두고 지역민들은 '무당골 전투'라고도 부른다.
이 전투 패배로 포항은 북한군에 또다시 함락당했다. 수세에 몰린 한국군은 형산강 남쪽으로 물러나 최후의 방어선을 쳤고, 이때 전쟁의 판도를 바꿀 '형산강 전투'가 시작됐다.
◆반격의 불씨가 된 '형산강 전투'
위대한 전투가 그렇듯 이 전투도 큰 위기에서부터 출발했다.
9월 4일 한국군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포항을 점령한 북한군이 엄청난 위세로 한국군을 몰아붙이자 방어에 유리한 형산강 강변을 끼고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계획을 짜고 상부의 승인을 받았다.
한국군 제3사단은 5일 오후 2시 30분부터 후퇴하면서 이날 저녁 형산강변을 따라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다음날 완료하며 사주 경계에 들어갔다.
북한군은 한국군의 두터운 방어선에 가로막히자 남구 효자동과 연일읍 유강리를 동서로 이은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선의 약점을 찾는데 집중했다.
방어선은 한 장교의 안일한 부대 운영으로 구축된 지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7일 늦은 밤 제8사단 제10연대장이 제3사단 22연대가 오길 기다린 뒤 근무지 교대를 해야 하지만 22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부대를 철수시켜버린 탓이었다.
약 5㎞ 구간에 걸쳐 생긴 방어 공백을 북한군은 놓치지 않았다. 북한군은 곧바로 부대를 집결시킨 뒤 형산강변으로 진격했고, 한국군은 형산강을 건너 남쪽으로 수㎞를 밀려난 곳에 다시 방어선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국군은 도하 시도를 계속했지만 부대가 강을 건넜어도 후속 부대가 오지 못해 다시 강을 건너가야 하는 일을 되풀이했다.
그러던 끝에 18일 새벽 소규모 특공대가 형산강을 건너고 뒤따르던 부대들이 북한군을 몰아붙여 포항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의 영웅 연제근 상사는 포항시 남구 해도동 근린공원에 동상으로 만나볼 수 있다.
형산강 도하전투에 12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참전한 연 상사는 어깨가 북한군의 기관총 사격에 관통되는 고통 속에서도 적 진지에 수류탄을 던져 파괴시켰다.
연 상사와 돌격대원 8명은 목숨을 잃었지만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한국군이 형산강을 건너 포항을 탈환하고 서울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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