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영화 ‘교섭’

탈레반 한국인 피랍사건 모티브
테러리스트와의 교섭 속 딜레마
‘어떤 선택이 최선인가’ 질문 던져

영화 '교섭'의 한 장면.
영화 '교섭'의 한 장면.

임순례 감독의 '교섭'은 두 가지 난제를 지닌 영화다.

하나는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실화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2007년 온 국민을 충격 속에 몰아넣은 탈레반에 의한 한국인 피랍사건이 모티브다. 피랍된 23명 중 두 명이 살해되고, 대한민국 정부와 탈레반의 협상으로 21명이 최종 풀려났다. 실화의 굵은 뼈대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관객을 끌어갈 동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과제다.

또 하나는 관객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이다. 선교를 위해 정부의 여행 자제 권고도 교묘히 빠져나간 이들의 무모하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다. 그래서 이들의 구출 협상에 정부가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컸다. 거액의 혈세를 낭비하며, 테러리스트와 협상해선 안 된다는 외교 원칙까지 깨는 큰 희생을 치렀기 때문이다. '교섭'이 개봉 전에 이미 평점 테러를 당하는 것만 봐도 아직 남아 있는 국민들의 분노의 앙금을 알 수 있다.

이런 약점을 안고 있음에도 '교섭'은 긴장감을 건져 올리며 관객을 영화 속에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의 진정성과 연출의 힘이 잘 녹아든 때문이다.

테러리스트와의 교섭은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정부가 대응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는 셈이다. 그러나 자국 국민들의 죽음을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화는 여기에 두 인물을 배치해 관객을 이 딜레마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교섭전문가인 외교부 정재호(황정민) 실장이 한국에서 현지로 급파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교섭 중 국정원 요원 박대식(현빈)과 부딪힌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대식은 눈앞에서 인질이 참수되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탈레반과 대면 교섭을 주장한다. 그러나 정 실장은 외교라인을 통한 정통을 고수한다.

영화는 두 캐릭터의 충돌과 인질 사살이라는 다가오는 시한폭탄의 긴장감을 영화는 잘 그려내고 있다. 정 실장이 굳은 신념을 지녔다면, 대식은 행동으로 보여준다. 모터사이클 추격전과 총격전 등 과격한 시퀀스는 대식이 도맡아 처리한다. 갈등하던 둘은 더 이상 희생자를 만들 수 없다는 공동 목표에 도달한다.

영화 '교섭'의 한 장면.
영화 '교섭'의 한 장면.

'교섭'은 일반적인 테러리스트 인질 영화와 결이 다르다. 보통의 영화가 테러리스트들의 과격함과 희생자들의 끔찍한 죽음을 강조하면서 긴장을 유발하지만, '교섭'은 죽음의 모습을 최대한 자제한다. 직접적인 죽음 또한 선교단을 싣고 가던 현지 버스 운전사뿐이다.

죽음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을 통해 긴장감을 끌어내겠다는 임순례 감독의 고집이 엿보인다. 교섭의 딜레마 속에서 틈을 찾아 마지막 카타르시스를 끌어낸 것도 영리하다. 애초에 탈레반은 수감된 동료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친미 정부는 사우스 코리안을 위해 자신들의 입지를 놓을 리 만무했다. 인질들을 죽여도 한국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을 탈레반도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 것은 이런 딜레마 속에서 어떤 선택이 최선인가라는 물음이다. 그 어떤 리스크도 국민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대명제이다. 이를 위해 목숨까지 거는 이들의 숭고함과 휴머니즘이 영화가 가는 길이고, 다 아는 결말이지만 감동을 느끼게 하는 영화의 힘이다.

배우들의 앙상블도 꽤 좋다. 자신만의 신념으로 똘똘 뭉친 정 실장 역을 황정민이 특유의 뚝심 있는 캐릭터 연기로 잘 보여주고, 현빈의 고집스러운 요원 역도 잘 어울린다. 둘의 캐릭터가 다소 전형적이며 진부함도 느껴지지만, 현지 한국인 통역사 카심 역의 강기영 배우가 유머러스하게 중화시켜준다.

임순례 감독이 영민하다 느낀 또 하나는 인질들에게 서사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샘물 교회' 인질들에게는 두려움의 감정만 부여한다. 선교단의 여정이나 인질이 된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연민, 안도감, 걱정 등은 철저히 배제시킨다. 카심이 하는 "그 사람들 뭐 하러 이런 곳에 와서 애먼 사람 개고생시키냐"라는 대사가 그 어떤 동정도 없는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순제작비 150억 원이 투입돼 요르단에서 촬영된 '교섭'은 '세친구'(1996),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리틀 포레스트'(2018)을 연출한 임순례 감독의 첫 대작 액션영화다. 휴머니즘이라는 주제의식을 놓치지 않았던 전작들처럼 '교섭'도 그의 진정성이 잘 묻어나는 작품이다. 108분. 12세 이상 관람가.

김중기 영화평론가

영화 '교섭'의 한 장면.
영화 '교섭'의 한 장면.
영화 '교섭'의 한 장면.
영화 '교섭'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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