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국-대만 제외 '新에치슨 라인' 구상하나?…급변하는 반도체 산업 지형도

잃어버린 30년 일본 반도체 재도약…한국 추격 가속화
AI 시대 한국 반도체 위상 유지 위한 대책 마련 시급

TSMC 구마모토현 제1공장. 연합뉴스
TSMC 구마모토현 제1공장. 연합뉴스

미국과 중국의 첨단산업 패권전쟁으로 반도체 산업 지형도가 재편되고 있다. 특히 1950년 6·25 전쟁의 도화선이 됐던 미국의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에 빗대, 미국 조야에서 반도체 강국 대만-한국을 제외시키려고 일본을 포함한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형성해야 한다는 '신(新) 애치슨 라인' 구상이 제기돼 한국 정부와 반도체 업계의 치밀한 대응이 요구된다.

애치슨 라인은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1893~1971)이 선언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이다. 이는 소련과 중국의 영토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알류샨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으로 규정한 것. 신애치슨 라인은 미국의 반도체 동맹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고 일본, 미국 중심으로 가져가려는 움직임이다.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칩4 동맹'에 속해 있으나 적극적인 반도체 외교와 중장기적인 성장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반도체 르네상스'를 꿈꾸는 일본의 추격이 매섭다.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분야를 주도하는 대만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고, 미국은 일본과 공동 연구센터를 건립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다. 최근 미국 정부는 영국·호주와 결성한 안보 군사동맹인 '오커스'(AUKUS)에 일본을 포함시키는 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히며 보다 긴밀한 관계임을 과시하고 있다.

경제안보 중심에 선 반도체 산업의 현황을 짚어본다.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1위 업체인 대만 TSMC의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제1공장 개소식이 24일 열렸다. 공장 밖에서 농삿일을 하는 농부의 모습. 연합뉴스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1위 업체인 대만 TSMC의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제1공장 개소식이 24일 열렸다. 공장 밖에서 농삿일을 하는 농부의 모습. 연합뉴스

◆ 잃어버린 30년, 일본의 반도체 굴기

지난 2월24일 일본 구마모토현에서 TSMC 제1공장 개소식이 열렸다. 양배추를 재배하는 농촌 마을인 기쿠요마치(菊陽町)에 반도체 제조 공장이 들어선 것. TSMC는 부지 약 21만㎡를 확보하고 클린룸( 4만5천㎡)을 포함한 FAB동과 오피스동, 가스 저장시설 등을 설립했다.

반도체 산업 부활을 노리는 일본 정부의 대표적인 지원 정책의 결실이다. 앞서 일본 정부는 TSMC 제1공장 설비투자액의 절반에 가까운 최대 4천760억엔(약 4조2천억원)의 보조금을 지원했다. 또 TSMC는 구마모토현에 제2공장 건설 계획을 이미 발표한 데다, 주변에 소니그룹 등 관련 기업의 반도체 공장이 들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이 반도체 산업 주도권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1990년대 이전 세계 시장을 선도했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일본 정부가 지난해 8월 발표한 '2024년 경제산업정책 중점안'을 보면 반도체 산업 산출액 목표는 2030년 기준 15조엔(132조1천365억원)이다. 과거 독자적으로 추진했던 반도체 산업 전략이 실패했다는 진단을 내렸고 단계별로 미국과 대만, 벨기에 등과 적극적인 연계를 추진 중이다.

TSMC와의 협업은 1단계에 해당한다. 국내 반도체 생산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파운드리 1위 기업 TSMC를 유치한 것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덴소, 소니 등 자국 반도체 기업의 합작회사인 'JASM'(Japan Advanced Semiconductor Manufacturing)을 설립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이어 차세대 반도체 설계 기술 개발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개방형 연구개발 거점과 양산 거점을 구축할 방침이다. 기술연구조합 최첨단반도체연구센터(LSTC)와 라피더스(Rapidus) 설립을 지원한다. 또 미래 기술 연구 개발을 위해 차세대 반도체에 활용될 광전 융합 및 양자 기술 연구개발을 함께 추진한다.

일본 반도체 산업 전략. KOTRA 제공
일본 반도체 산업 전략. KOTRA 제공

◆ 위태로운 K 반도체 위상

일본은 대외적으로 중국을 견제한다는 목표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실제 위협을 받고 있는 건 바로 한국이라는 해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AI(인공지능) 시대 관련 첨단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는 가운데 미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밸류체인(가치사슬)이 형성되고 있다. 문제는 반도체 동맹을 형성하는 데 있어 한국 반도체 산업의 한계가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30년간 대만과 한국은 세계 반도체 생산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파운드리 점유율 60%를 자랑하는 TSMC와 2위 삼성전자가 대표 주자다. 여기에 일본이 JASM 설립을 계기로 경쟁에 뛰어들면서 경쟁은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특히,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에 치우진 성장을 지속한 탓에 분업화에 취약하다는 약점도 지니고 있다. 경쟁국인 대만의 경우 파운드리는 물론 설계, 후공정 등 전 분야가 고르게 성장한 반면 한국은 메모리 종합반도체사(IDM)의 몸집만 커졌다. AI 반도체 생산의 핵심으로 꼽히는 후공정 패키징의 경우 한국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6%에 불과하며 이는 중국에도 뒤쳐진 수준이다.

일본의 성장 잠재력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강국의 명성에 걸맞게 제조장치 분야에서 높은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도쿄일렉트로닉, 어드밴스테스트, 스크린 등 공정별 글로벌 점유율 1위 기업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현재 네덜란드 ASML이 주도하고 있는 노광장비도 기술의 원조격인 니콘과 캐논을 앞세워 연구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 반도체 투자 현황. 트렌드포스 제공
일본 반도체 투자 현황. 트렌드포스 제공

◆ 한국이 승자로 남으려면

급변하는 흐름 속에 한국 반도체가 입지를 넓히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다. 경쟁국과의 격차를 줄이는 한편 추격을 준비하는 일본과의 경쟁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형수 HSL파트너스 대표는 "미·중 패권경쟁이 촉발한 반도체 밸류체인 재구성이 가속화되고 있다. 결국 미국 중심의로 새로운 판을 짜고 있는데 여기 한국이 배제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과거 미국은 일본이 세계 2위로 급부상했을 때 무역과 기술력, 금융을 내세워 경제대국 1위 자리를 유지했다. 지금도 중국을 압박하는 카드로 같은 전략을 구사하고 있고 핵심은 바로 반도체"라며 "이 과정에서 일본을 가장 가까운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어 "일본은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소부장 기업이 탄탄하다. AI혁명을 주도하는 기초과학 분야 인재가 다수 배출되고 있고,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높다는 것도 강점"이라며 "기업과 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국가별 지원금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어 우리 정부도 대응에 나서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산업 클러스터를 분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력공급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물론 국가균형발전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

이번 쿠마모토 반도체 파운드리 건설은 지역 경제 부활의 신호탄이 됐다. 규슈경제조사협회는 2021년부터 10년간 반도체 설비 투자에 따른 규슈 지역 경제효과를 20조770억엔(약 180조원)으로 추산했다.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들이 신설하는 반도체 공정에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특정 지역이 아닌 일본 전역에 걸쳐있다.

라피더스의 홋카이도 공장에는 보조금 3천300억엔(약 2조9천억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 외에도 키옥시아(옛 도시바메모리)와 미국 기업 웨스턴디지털(WD)이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할 미에현 욧카이치 공장과 이와테현 기타카미 공장에도 2천430억엔(약 2조1천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반도체 산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은 국가 주요 산업으로 파급효과가 크다. 전문성에 초점을 맞춰 지역별 분산을 추진한다면 수도권 비대칭 문제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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