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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지금, 여기에 있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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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그림의 운명
이명 지음 / 미술문화 펴냄

[책] 그림의 운명
[책] 그림의 운명

모름지기 정사보다 야사가 더 재밌다. 편전에서 국사를 논하는 정승판서의 근엄한 수염보다 궁궐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후궁과 환관의 시기질투와 분 냄새가 더 이목을 끄는 법. 80년대 방송된 '조선왕조실록'의 최고 인기물은 '설중매'였다. 이 시리즈는 세조와 연산군을 다뤘는데도 정작 시청자를 사로잡은 건 정진과 변희봉이 맡은 한명회와 유자광이었다. 예술은 다를라고.

미술작품에 얹힌 가치와 의미는 전문가의 영역일지 몰라도 나처럼 평범한 관람객에겐 그림을 둘러싼 또 다른 이야기가 있지는 않을까 귀를 쫑긋거리는 게 인지상정. 예컨대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가 쓴 음식역사서에 등장하는, 보티첼리와 다 빈치가 동업해 '산드로와 레오나르도의 세 마리 두꺼비'라는 식당을 차렸다는 일화 말이다. 미술에 관한 많은 책들, 즉 미술관을 산책하거나 소장품을 소개하거나, 세기의 걸작과 거장의 예술세계를 조망하고 해설하는 책들은 흔하디흔하다. 미술관과 박물관에 대한 공시적이거나 통시적인 사설도 널렸다. 미술작품과 전시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그림의 운명'이 눈을 사로잡은 건 정교한 구성의 힘이 크다. 그러니까 이 책이야말로 콘텐츠의 선택과 집중이 무엇인지 알려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15편이라는 적은 수의 작품을 다루는데도 확고한 주제의식과 풍성한 설명 덕분에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누었다가 모으고 다시 흩어지는 이야기가 미술사와 만날 때 개별 작품들은 새롭게 빛난다. 요컨대 제 자리에 놓인 그림과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는 작품들. 그 공간에 놓이기까지의 우여곡절이 담겼다.

책은 미술애호가라면 알만한 유명한 작품이 '왜 그곳에 걸려(놓여)있는가?'라는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의심할 바 없이 '모나리자'가 루브르에 있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나 같은 사람에게 저자는 5개로 구분된 공간과 작품의 연관성과 숙명적 필연을 내보인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왜 뉴욕현대미술관으로 갔는지, 모네의 '수련'이 일본에 머문 까닭은, 카유보트의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가 시카고에서 조명된 이유를 쉽고 친절하게 풀어낸다. 또 자신의 이름을 딴 박물관에 작품을 건 살바도르 달리와 여러 곳으로 흩어진 누드화를 그린 모딜리아니처럼 한곳에 작품이 모인 예술가와 뿔뿔이 흩어진 예술가의 뒷이야기를 다룬 대목도 흥미롭다.

루브르의 '모나리자' 이야기를 살짝 엿보면, 다 빈치가 인생의 마지막 3년을 보낸 프랑스.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프랑수아 1세는 다 빈치를 불러들이기 위해 공을 들였다. 1516년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향하는 다 빈치 손에 들린 그림은 3점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모나리자'라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종종 미술관을 찾아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작가와 작품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전시공간과의 조화와 친연성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림의 운명'은 모든 예술작품의 운명이 있다고 말하면서 영속하는 생명을 불어넣는다. 말하자면 모든 예술품은 지금 여기, 이 작품이 있어야 하는 이유와 사연을 당위성으로 품었다는 얘기다. 숱한 외침과 강점기 시절의 수탈 속에서도 이 땅에 남은 문화유산들 또한 저마다 이야기를 간직했을 것인 즉. 언젠가 한국화가의 그림을 다룬 속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기꺼이 기대할 만하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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