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빗물처럼 쓸쓸한 어떤 정조(情操)

[책] 팔월의 일요일들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책] 팔월의 일요일들
[책] 팔월의 일요일들

전체의 8할을 읽을 때까지도 내 머릿속은 이 소설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사건의 중심에 선 실비아는 다이아몬드와 함께 연기처럼 사라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끝까지 읽고서야 시간의 역순으로 진행되는 작품이란 걸 알아챘다. 현재와 과거와 대과거. 현재는 누구의 여자도 아닌 실비아와 과거엔 나의 여자였던 실비아. 그보다 전엔 다른 남자의 여자 실비아.

명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확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데 사진을 찍는다며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내 아내 실비아 옆에서 얼쩡대고 환심을 사더니,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 공식적인 공간에 입성했다. 그리고는 아내와 다이아몬드, 둘 다 훔쳐 둘이 도주해버렸다. 언짢은 마음에 말다툼 끝에 아내를 때린 게 화근이었다. 아내는 나를 폭력이나 휘두르는 무자비한 인간이라 말했을 테고 보석을 들고 함께 도주하자고 그를 꼬드겼을 것이다. 반드시 실비아를 되찾고 보석도 찾을 것이다.

소설의 화자인 '나'의 의해 불한당으로 묘사된 실비아의 남편 빌쿠르의 시점으로 풀어보았다. 누구의 관점이든, 이런저런 사건들이 한바탕 지나가고, 결국 실비아는 영원히 사라져버린다. 이쯤에서 드는 당연한 질문. 그래서, 뭐 어쨌다는 말인가? 대체 작가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가.

도덕적으로 결함 가득한 이들이 등장하는 피카레스크의 변형 서사인가 싶더니, 다이아몬드 남십자성은 히치콕 영화의 맥거핀처럼 보이기도 하고, 인물과 다이아몬드에 정신이 팔린 독자의 주의산만을 질책하려는 듯한 나른한 이야기. 그러나 작품의 진가는 다른 곳에 있었다.

작가 모디아노는 며칠 계속해서 비가 내린 어느 일요일 니스의 풍경을, 남편의 다이아몬드를 들고 도망친 여자와 그녀를 무턱대고 받아들인 주인공이 숨어든 장소를, 그러니까 낙엽 긁는 소리를 내면서 철책문이 열렸고, 어둑한 작은 길을 따라 입구의 유리판 위에서 전구 불빛이 비치는 별채까지 이어진 카파렐리 가의 생트 안 하숙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침이면 잠에서 깨어 정원에 있는 작은 헛간의 함석지붕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종일 이 모양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 우리는 저녁이 오기를 기다려 외출했다. 낮에는 프롬나드 데 장그레에, 종려나무와 밝은 색 건물들 위에 내리는 비 때문에 마음이 쓸쓸하기만 했다. 비는 벽들을 적시고, 얼마 지나지않아 오페레타의 무대배경 같은 풍경과 과자로 만든 집 같은 색채들을 완전히 녹여놓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전등 불빛과 네온등 덕분에 그런 비탄의 기분이 가셨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가 한국 멜로영화의 정수라 불리는 까닭은 사랑을 운동(사건)이 아닌 시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사랑은 어떤 극적인 사건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놀라운 일이 아니라, 소소한 감정의 순간들이 모인 것이라고 말한다. 기다리던 시간, 그리워하던 그때, 멀리서 나타날 연인을 기다리는 순간들 말이다.

'팔월의 일요일들'에서 중요한 건 사건이나 합리적 이성으로 풀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외려 우리 삶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건 그 여름 일요일 니스, 마른 강가의 햇빛과 유령처럼 떠도는 인물들이 불연속적으로 스치는 시간이라고 모디아노는 말하고 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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