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여행이 들려주는 마케팅 이야기-하태길]캐나다 로키 트레킹, 자연이 설계한 길을 걷다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라치 밸리 트레일 시작점 모레인 호수. 하태길 겸임교수 제공
라치 밸리 트레일 시작점 모레인 호수. 하태길 겸임교수 제공

2025년 7월 여름, 나는 캐나다 앨버타주(Alberta) 밴프(Banff) 국립공원을 찾아갔다. 온통 하얀 기억으로 남아있던 여섯 해 전 겨울 로키에 푸른색을 더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과는 달리 마케터의 시선으로 로키를 들여다보고자 했다.

◆라치 밸리 트레일(Larch Vally Trail), 총 11km, 약 6시간

밴프 국립공원의 첫 트레킹 코스로 라치 밸리를 선택했다. '라치(Larch)'는 침엽수지만,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잎을 떨구는 독특한 나무다. 그래서 특히 단풍이 드는 9월경에 많은 트레커들이 찾아오는 코스라고 한다. 그렇지만 내가 찾은 라치 밸리는 여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맑게 시작한 날씨가 점점 흐려지더니, 어느 순간 바람에 흔들리며 비를 뿌리기도 했다. 그러다 금세 다시 햇살이 비치고, 시원한 공기가 다가왔다. 준비해 간 우비를 입었다 벗었다 하느라 발걸음은 느려졌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풍경은 내 안에 더 깊이 스며들었다. 로키를 걷는다는 건 그저 자연을 통과하는 일이 아니었다. 앞도 없고 뒤도 알 수 없는 숲길을 바람이 먼저 지나가며 비워주면 나는 말없이 그 길을 채워가며 따라가는 시간이었다.

물안개가 자욱한 아침, 비가 내리는 모레인 호수에서 라치 밸리 트레일이 시작됐다. '모레인(Moraine)'은 빙하가 흘러내리며 남긴 암석 더미를 의미한다. 빗방울이 떨어지며 동그랗게 퍼지는 잔잔한 물결들은 터키블루(Turkish blue) 색의 호수 위로 겹겹이 짙은 울림을 만들었다. 모레인은 캐나다를 대표하는 호수 중 하나로, 한때 캐나다 20달러 지폐의 배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20달러 풍경(Twenty Dollar View)'이라고도 부른다.

이처럼 특정 장소를 화폐 디자인으로 선택하는 것은 마케팅에서 '플레이스 브랜딩(Place Branding)'으로 볼 수 있다. 지폐는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이기 때문에, 지역의 자연경관을 담는 것은 그 장소를 국가 브랜드의 일부로 포지셔닝(Positioning)하는 효과를 가진다. 모레인 호수가 지폐를 통해 전 세계인에게 각인된 것처럼 장소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의 브랜드로 거듭날 수 있다.

출발 후 계속 추적추적 내리던 비에 나무껍질은 더 단단해져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이끼에서 피어나는 향이 코끝을 자극하고, 그 냄새에 비가 잠시 멈춘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흐린 하늘과 간헐적인 햇살, 변덕스러운 날씨는 매 순간 감각을 새롭게 일깨웠다. 걷다가 멈춰 쉴 때마다, 진한 이끼가 꽃처럼 피어난 곳은 바위여서 앉기조차 아까웠다. 물웅덩이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서야 '해가 났구나' 싶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라치 밸리의 숲길을 걷다 보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무심코 지나치며 살아왔는지 묻게 되었다. 호수를 왼편에 두고 한참을 오르자, 길은 울창한 숲으로 이어졌다. 길 위로는 안개와 구름에 둘러싸인 텐 픽스(Ten Peaks), 열 개의 뾰족한 봉우리들이 맑은 날인가 착각하며 살짝살짝 웅장한 모습을 내밀었다.

야생 동물의 오아시스 미네스티마 호수. 하태길 겸임교수 제공
야생 동물의 오아시스 미네스티마 호수. 하태길 겸임교수 제공

약 두 시간을 걸었을 무렵, 저 멀리 센티널 패스(Sentinel Pass)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아래로는 미네스티마 호수(Minnestimma Lakes)가 펼쳐져 있었다. '미네스티마'는 원주민 언어로 '산 아래의 물'을 뜻한다고 한다. 야생동물들의 오아시스 같은 이 호수는 회색빛 산세와 어우러져, 해발 2,611m 센티널 패스를 오르기 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 되어주었다. 미리 준비해 온 도시락을 꺼내 허기를 달랬다. 먹빛의 여백이 아름다운 수묵화 같은 사방을 둘러보며.

센티널 패스로 향하는 길은 지그재그로 휘어진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중턱쯤 올랐을까, 갑작스레 비가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비를 꺼낼 틈도 없이,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바라보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마다 흔들리듯 미끄러졌고, 빗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상에 닿았을 땐, 마치 누군가 장난이라도 친 듯 비가 뚝 그쳤다.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다보니, 텐 픽스의 날카로운 봉우리들이 원형극장처럼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눈앞에는 템플산(Mount Temple)이 날카롭게 솟아 있어 손을 뻗으면 닿을 듯했고, 반대편으로는 이름처럼 아름다운 파라다이스 밸리(Paradise Valley)가 길고 깊게,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이 어딘가의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하산길, 회색 바위 사이를 바삐 오가던 마멋(marmot) 한 마리. 주변 바위, 돌의 색과 닮아 처음엔 지나칠 뻔했지만, 익살맞은 몸짓에 금세 눈길을 잡았다. 녀석은 잠시 나를 경계하다가도, 이내 주변을 통통거리며 돌아다녔다. 내려갈수록 비는 잦아들고, 흐렸던 하늘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맑아진 공기 사이로 푸른빛이 스며들었고, 다시 마주한 모레인 호수는 청록빛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 처음 보는 풍경 인양, 말없이 바라봤다.

텐 픽스로 둘러싸인 센트널 패스 정상. 하태길 겸임교수 제공
텐 픽스로 둘러싸인 센트널 패스 정상. 하태길 겸임교수 제공

◆빅 비하이브 트레일(Big Beehive Trail), 총 10km, 약 4시간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는 캐나다 밴프 국립공원을 대표하는 절경 중 하나로, 에메랄드빛 빙하 호수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전 세계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882년, 캐나다 태평양 철도 탐험대가 이곳에 도달한 뒤, 당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넷째 딸이었던 루이스 캐롤라인의 이름을 따 '레이크 루이스'라 명명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작은 물고기들의 호수(Lake of the Little Fishes)'로 불리는 삶의 터전이었다. 실제로 호수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서식했고, 주변에는 사냥감뿐 아니라 식용 식물과 약초들도 풍부해 원주민들에게는 삶의 한가운데에 있던 장소였다.

빅 비하이브 트레일은 레이크 루이스를 곁에 두고 걷는 길이다.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구간이 이어지지만 밴프 국립공원을 대표하는 레이크 루이스를 보면서 트레킹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말을 타고 오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건강해 보이는 말의 등에 올라 레이크 루이스를 내려다보며 하산하는 팀과 마주쳤을 때, 아직 정상에 오르지 못한 나는 그들의 느긋한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빅 비하이브 트레일에서 만난 승마 트레킹 팀. 하태길 겸임교수
빅 비하이브 트레일에서 만난 승마 트레킹 팀. 하태길 겸임교수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거대한 벌집 모양의 바위가 눈앞에 나타났다. 바로 빅 비하이브(Big Beehive)였다. 둥그스럼한 바위산이 주름진 벌집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 하나로 풍경은 단숨에 생동감을 얻었다. 마케팅에서 사물의 외형이나 인상을 친숙한 이미지로 연결하는 방식은 '비유적 명명(Metaphoric Naming)'이다. '벌집'이라는 은유는 웅장한 바위산을 친근한 존재로 재해석하는 단어가 되어, 소비자에게 직관적인 연상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 아래 자리한 아주 작은 미러 호수(Mirror Lake) 역시 같은 전략이 응용된 사례다. 거울 같은 수면 위로 산과 하늘을 고스란히 비추는 이 맑은 호수는, 이름처럼 자연의 거울이 된다. 밴프의 호수들이 워낙 광활하다 보니 미러 호수는 상대적으로 소박한 풍경이지만, 등반길에 마주친 이름 없는 폭포와 함께, 작지만 커다란 장소로 나의 기억에 남았다.

티하우스가 있는 아그네스 호수. 하태길 겸임교수 제공
티하우스가 있는 아그네스 호수. 하태길 겸임교수 제공

숲길을 지나 도착한 아그네스(Agnes) 호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해발 약 2,135m에 위치한 이 빙하호에는 트레커들에게 인기 있는 티하우스(Teahouse)가 자리하고 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손에 들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지난 이야기를 나누듯, 호수 주변의 산자락을 바라보며 쉼표를 찍었다. 빙하에서 내려온 물로 우려낸 한 잔의 차. 수만 년을 흘러온 물이 손안에서 김을 피운다는 이 감각은 '맛'이라기 보다는 바람과 얼음이 남긴 촉감이었다.

티하우스는 여전히 현금만 받았다. 모바일 결제와 와이파이에 익숙한 시대에 의외의 기억을 남긴다. 불편함이 곧 정체성이 되는 이곳은 아날로그 감성이라는 브랜드를 만든다. 선택된 불편함은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몰입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브랜드가 없어도 '빙하수'라는 스토리텔링은 이곳의 경험을 유일한 것으로 만든다. 티하우스 안은 활기가 있었다. 마주 앉아 있어도 각자의 휴대폰에 열중하는 요즘 카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눈빛을 보며 오고 가는 언어 속에는 간간이 아그네스 호수로 흘러가는 향기도 담겨 있었다.

아그네스 호수를 한 바퀴 휘돌면서 시작된 빅 비하이브의 가파른 오르막길은 나의 체력을 시험했다. 그러나 정상에 이르자, 비에 씻긴 산들과 햇살을 머금은 레이크 루이스가 살랑이는 바람과 함께 나타나 온몸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감각, 정서, 경치 이 모든 요소가 절묘하게 겹친 순간이었다. 그곳에서 느낀 최고의 보상은 차곡차곡 쌓인 여정 속에 적립한 감정이었다. 자연도 의도하지 않은 이 설계는, 체험 기반 브랜드 전략의 이상적 모델이 될 수 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며 뿌연 안개마저 시야를 방해했지만 그럴수록 주변의 산들이 에메랄드빛 호수를 진하게 감싸안고 있었다.

한참을 머물다가 왔던 길로 다시 내려왔다. 길을 안내해 주고 싶은지 자꾸만 따라 내려오던 다람쥐 한 마리 때문에 연신 웃어댔다. 사라졌나 싶으면 또다시 나타나 종종대던 모습이 너무 귀여워 다정하게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아그네스 호수 주변으로 야생화들이 물결치듯 피어 있었다. 내려가는 발길을 잠깐 멈추고 사진을 찍고 있던 중, 인도에서 왔다는 K-POP 팬들과 조우했다. 정상까지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충분히 갈만한 길이라는 뻔한 답을 주었다. 그 순간 유쾌한 웃음들이 터져 나와 빅 비하이브 트레일은 달콤한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빅 비하이브 정상에서 내려다 본 레이크루이스. 하태길 겸임교수 제공
빅 비하이브 정상에서 내려다 본 레이크루이스. 하태길 겸임교수 제공

◆기억의 마케팅, 반복 가능한 감동

여름의 밴프 국립공원은 변화무쌍했다. 2019년 겨울의 로키는 하얀 정적이었지만 비, 바람 그리고 잠깐의 맑음이 7월의 로키 트레킹을 더욱 풍성하게 완성해 주었다. 하지만 계절과 상관없이 감정을 흔든 것은 로키였다. 장소는 같지만 기억은 달랐고 진한 여운은 또 다른 결로 반복되었다. 브랜드가 지향해야 할 최종 가치는 반복 가능한 감동일 것이다. 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힘, 마케팅에서는 이것을 리텐션(Retention)이라 한다.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하태길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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