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기차에서였다. 종착역에서 내려 전철로 갈아타고 다시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도 책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섬으로 가는 길이었다. 책에 나오는 곳은 아니지만(너무 커서 나올 수 없고 섬이라기엔 육지에 가까운) 거제도를 향하고 있었다.
'류가헌 갤러리' 박미경 관장이 10년 세월 동안 섬을 다니며 취재한 글을 엮어낸 '섬'. '섬'은 2005년 1월 문갑도에서 시작해 2016년 소무의도까지 19개 섬과 섬사람을 만난 기록이다. 또한 고립무원의 외로움을 초월한 생명력에 대한 찬가이고, 그리움을 이겨낸 자부심에 관한 연대기이다.
섧고 외로운 시절을 어찌 견디며 살았을까. 무엇이 그들의 삶을 붙들어놓았을까. 섬에서 태어나 섬을 떠나지 못하는 숙명 같은 삶에 대해 박미경은 때론 애달프게 때로는 경이로운 시선으로 담아낸다. 시작은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만남이었을 테지만, 저자는 듣는 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즉 오롯하게 그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에 담을 뿐이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쉽사리 개입하지 않는 충실함이 한편의 서사시를 완성시킨 동력이다.
"저거 때문에 영감 할멈이 어디를 한번에 같이 나가본 적이 없어요. 집에 산목숨들이 있으니께"(27쪽) 어디 문갑도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에 국한될까. 섬에서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꽃이든 나비든 모두 귀하다. 갯것이 있어 갯일을 하고 그 힘으로 생명을 부지하며 자식을 키운 이들답다. 예전과 달리 공과금과 카드대금청구서와 독촉장 등이 대부분인 요즘 우편물을 보면"옛날같이 흐뭇한 편지들 좀 더 날라보고 싶다"(42쪽)는 연도 집배원 강씨. 섬이라고 세상 흐름에서 비켜 갈 수 있을라고.
사투리와 구어체가 뒤섞이고 고령자 세대의 현장 용어가 난무하는데도 외려 정감 넘치고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건 저자의 마음 덕분일 터. 그러니까 문법을 까칠하게 적용하기보다는 거친 땅에서 고된 세월을 버텨온 그들의 삶을 헤아리려는 인간애가 빚어낸 저작이라는 얘기다.
"그동안 온갖 삶의 굴곡을 다 넘었으니, 이제 남은 생의 어떤 변화도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우고 넘어야 하는 가게 앞 얕은 둔덕만큼도 두렵지 않다."(62쪽)는 서쪽 작은 섬 모도의 슈퍼 할머니도, "산지기, 문지기 하듯 격하해서 부르는 것 같아 등대지기라는 표현도 좋아하지 않지만"(145쪽) 그렇다고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라는 추킴도 싫다는 거문도 등대원 한소장도, 목포항에서 페리를 타고도 5시간이나 걸려 "아들은 와도 며느리는 안 와라. 하도 섬이 먼께. 어쩌것소? 자석손주들 볼라면 우리가 나가야제"(164쪽) 하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섬 만재도의 잠녀 할머니들도 모두 평안하기를. 굴업도에서 민박을 치며 삶을 잇는 서인수 최인숙 씨 부부의 사진(198쪽)은 근래 본 가장 아름다운 부부의 얼굴이었다.

길게는 10년도 지난 글을 책으로 펴낸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 기억 속에서만 여전히 그 섬을 사는 중인 사람들이 여러 사람의 기억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본다." 책이 출간된 지 9년. '멀어서, 그리운 것들 오롯하여라'는 부제대로 모두 여전할까. 연도의 집배원 강씨는 오늘도 사람과 사람 사잇길을 달리고 계실까. 효자도의 정원이와 풍도 미쓰 고네 야외다방은 건재한지 나도 궁금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 섬의 삶이 함께 덮였다. 아득한 수평선이 눈앞으로 밀려왔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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