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있는 힘껏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 여기 없었을 겁니다."
대구 도심 한복판에서 63톤짜리 천공기가 도로 위로 쓰러지는 아찔한 사고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택시기사 이모(61)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순식간의 판단으로 대형 참사를 피했지만, 사고 발생 엿새째 병원에 입원 중인 그는 두통과 불면, 사고 장면이 반복해서 떠오르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 순간적인 기지로 승객 구해
지난 4일 오전 9시쯤 대구 수성구 만촌네거리 도시철도 지하연결통로 공사 현장에서 작업 중이던 천공기가 왕복 8차로 도로 위로 전도됐다. 사고가 난 천공기는 지하 시설물 설치에 앞서 지반을 뚫는 기초 공사에 투입되는 대형 중장비로, 무게 63톤(t), 길이 21m에 달했다.
사고 현장을 지나던 택시 블랙박스 영상에는 불과 5m 남짓 앞에서 천공기가 쓰러지는 긴박한 순간이 고스란히 담겼다. 차량이 조금만 더 속도를 냈다면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이 씨에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또렷하다. 인근 아파트에서 승객을 태운 뒤 약 1㎞를 운행하던 중 난생처음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천공기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반쯤 기울어진 순간에야 상황을 알아차렸다"며 "이미 시속 50㎞로 달리고 있어 '아,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1초도 채 되지 않는 순간, 엑셀을 밟고 통과할지 브레이크를 밟을지 선택해야 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반사적으로 두 발을 동시에 브레이크 위에 올려 있는 힘껏 밟았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하나는 천공기가 쓰러지며 발생한 굉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코앞에서 차량이 천공기 구조물과 부딪히며 난 충돌음이었다.
생명을 잃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 씨는 눈을 뜬 뒤 승객에게 "우리 살았다"고 말했다. 이어 승객의 손을 잡은 채 "정말 다행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 겁 모르던 경찰 출신…트라우마로 고통
목숨은 건졌지만 사고의 후유증은 컸다. 이 씨는 충돌 당시 핸들에 머리를 부딪혀 뇌진탕 진단을 받았고 현재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어지럼증이 심한 데다 허리와 목 통증이 이어져 하루 두 차례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사고 당시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하루 8시간 숙면을 취하던 그는 사고 이후 밤마다 2~3차례 잠에서 깨고 있다. 수면 부족이 이어지면서 삶의 질도 크게 떨어진 상태다.
그는 "32년 동안 경찰로 근무하며 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건물이나 철골 구조물만 봐도 '혹시 넘어오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먼저 든다"며 "병실에서도 TV가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불안하다"고 털어놨다.
노후 생계를 위해 이어오던 택시 운전도 계속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트라우마를 줄이려면 사고 기억을 떠올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운전대를 잡는 순간 당시 상황이 반복해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씨는 사고 현장의 안전 관리 문제도 지적했다. 그는 "만촌네거리를 지나가면서 공사가 진행 중인지조차 몰랐고 안전요원도 보이지 않았다"며 "교통량이 많은 도로인 만큼 현장 관리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공사 ㈜태왕이앤씨 측은 병원을 찾아 사과했지만 구체적인 보상 논의는 아직 진행되지 않았다. 이 씨는 "치료에 전념하라는 말만 들었을 뿐 병원비나 보상 문제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며 "앞으로 치료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몰라 불안하다"고 말했다.
태왕이앤씨 관계자는 "기사분이 심리적·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한다"며 "금전적 보상 방식에 대해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어 요구 사항을 확인한 뒤 대응할 계획이며, 보상 계획이 없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한편 전날 대구시와 대구교통공사, 국토안전관리원은 사고 현장을 찾아 합동 안전점검을 실시했지만 정확한 사고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객관적인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해 전문가 판단이 필요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에 감정을 의뢰했다"며 "결과가 나오기까지 한 달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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