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난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원작 영화 '남아있는 나날'(1993년)은 나치즘의 태동과 함께 전운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던 1930년대, 당시 영국의 '달링턴 홀'은 유럽 정치사의 중요한 현장이었다. 스티븐스(안소니 홉킨스 분)는 이 거대한 저택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수석 집사로 일하면서, 마치 종교적 소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자신의 책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스티븐스는 계급 제도를 굳게 신뢰하며, 자신이 모시는 고용주인 달링턴 경을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로 철저히 상정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가 이 완벽한 집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지독하리만치 차갑고 비극적인, 개인적 희생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그의 아버지가 저택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다. 임종 직전, 스티븐스는 아버지를 간호하는 대신 저택에서 열린 거물급 외교관들의 연회에서 발이 아픈 손님을 수발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다. 불과 몇 시간 전, 침대에 누운 아버지는 고용주의 요구에 집중하는 위대한 집사가 되라는 유언을 남겼고 스티븐스는 그 뜻을 따라 부정(父情)이라는 인간적 감정보다 집사의 직무에 더 충실한다.
스티븐스의 완벽한 감정 통제는 새로 부임한 하녀장인 미스 켄튼(엠마 톰슨)과의 관계에서 큰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귀족 사회의 전형적인 포커페이스 문화와 스티븐스의 직업적 결벽증 때문에 결코 그 선을 넘지 못한다.
켄튼은 스티븐스보다 훨씬 대담하고 주체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스티븐스의 방에 꽃을 가져다 놓거나, 그가 몰래 읽고 있는 책을 장난스럽게 빼앗으려 하며 그의 단단한 억압을 뚫고 들어가려 시도한다. 스티븐스이 켄튼에게 숨기려고 했던 책은 당황스럽게도 연애소설이었다. 책을 둘러싼 실랑이 장면은 가히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성적 긴장감과 억압된 관능이 폭발하는 명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자신의 감정을 늘 우회적인 방식으로만 표현한다. 켄튼이 저택을 떠날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낼 때조차 그는 "당신은 이 저택에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뿐,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진심을 끝내 꺼내지는 못한다. 그녀는 스티븐스를 좋아했지만, 자신에게 마음이 있으면서도 결코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완고함에 지치고 실망하여 그를 떠나고 만다.
스티븐스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감정을 폭발시키는 순간은 혼자 있을 때 와인병을 떨어뜨려 깨뜨리는 장면뿐이다. 그가 깨뜨린 것은 단순한 유리병이 아니라, 평생을 억눌러왔던 내면의 거대한 억압과 슬픔이었던 것이다.
이 영화가 시대를 초월해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과 체제를 단 한 번도 스스로 검증해보지 못한 인간의 보편적인 어리석음을 비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을 옥죄는 '자기 억압'과 '뒤늦은 후회'를 고풍스러우면서도 고통스럽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안소니 홉킨스는 역할을 준비하면서 실제로 버킹엄 궁전의 집사로부터 "집사가 방 안에 있을 때는, 그 방이 원래 비어있었던 것처럼 느껴져야 한다"는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스티븐스는 그 조언대로 방을 비우다 못해 자신의 인생 전체를 텅 비워버렸다. 의무와 품위라는 허상에 속아 정작 자신의 삶과 사랑을 돌보지 못했던 한 남자의 잔인하도록 슬픈 황혼,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남긴 지울 수 없는 여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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