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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현장-양승진] 쭈쭈바와 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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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 피자빵은 돌렸어도 투표지는 '빼앗지 않았다'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는 '개표소 봉쇄 시위'가 이어진 12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양승진 사회2부 기자
양승진 사회2부 기자

1996년 9월,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개학과 동시에 나는 '반장'이 됐다. 우리 반에 40명 정도가 있었는데, 투표 결과 내 이름이 20장은 나왔다. 엄마가 같은 학교 선생님인 게 컸다. 요즘 말로 '엄마 찬스'였을 수도 있다. 아니다, 엄마 찬스가 확실하다.

1997년 3월, 전학을 간 학교에서 곧장 반장이 됐다. 그때는 총 6명을 뽑았는데, 최다 득표자가 1학기 반장, 차순위가 2학기 반장이었다. 나는 9표를 받았다. 전학 간 첫날, 양복을 입고 간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보여 주기'가 통했다. 그날 할아버지(할배) 입은 귀에 걸렸었다.

1998년 3월, 난 3학년 2반이었다. 당연히 반장이 될 줄 알았지만 떨어졌다. 그때는 학기별로 나눠 반장을 뽑았다. 슬펐다. 집에 가서 할배를 보니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엉엉 울었다. 그날 할배는 "내일 아침부터 1천500원을 줄게, 선거운동 해라"라고 했다.

다음날부터 반 친구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할매가 매일 아침 주는 돈까지 하루 용돈은 2천500원. 그땐 아이스크림이 100원, 200원밖에 안 했다. 일주일이면 반 친구들에게 다 사주고도 남았다. 매달 한 번은 토요일(그때는 토요일도 학교에 갔다)에 엄마 아빠가 피자빵 같은 간식 배달도 해줬다. 그해 8월에는 압도적인 지지로 반장이 됐다.

10세가 되기 전 3년간 네 번의 반장 선거는 어린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교실 속 아이들의 정치에서 승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깨닫게 했다. 엄마 찬스, 잘 차려입은 옷과 곱게 빗은 머리, 용돈. 그러면 당장은 반장이지만 성인이 됐을 때에도 내가 얻고자 하는 무언가를 보다 더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걸 일찍 알았다.

10세가 되기 전, 내가 깨달은 '승리 공식'은 현실 정치에서도 유효한 듯하다. 지난 3일 끝난 선거에서도 수많은 엄마 찬스 후보자, 겉보기에 화려한 후보자, 돈선거를 한 후보자들이 제법 당선됐을 테다.

매일 1천500원을 주던 할배도, 피자빵 사다 나르며 치맛바람이 거셌던 엄마도 반장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반칙'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반 친구 모두 1표를 가졌으니, 모두에게 '쭈쭈바를 사주라' 했다. 엄마가 같은 학교 선생님인 게, 할배가 용돈을 많이 주는 게 반칙은 아니다.

인정한다. 다른 친구들보다 유리했던 건 맞다. 그래도 우리 반 친구들 모두 똑같이 1표의 권리가 있었다. 내가 사는 아이스크림을 먹었건, 안 먹었건 모두 1장씩 투표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투표용지가 증발했다. 부정선거 음모론자들도 상상 못 했을 방식이다. 그간 '투표용지를 주지 않았다'는 음모론은 없었다. 예측에 실패했건, 의도했건, 국민의 권리를 빼앗았다. 명백한 반칙이다.

'책임지는 자'는 아무도 없다. 선거관리위원회의 독립성을 운운한다. '선진' 선거 연수를 위해 몰디브, 부탄을 다녀온 것도 독립성일까? 분노한 2030에게는 '극우'의 굴레를 씌운다. 이러다 '내 편 무죄, 네 편 유죄'로 귀결될까 겁난다. 하루속히 전수조사, 특별 검사 도입 등이 시급해 보인다. 과거, 누구 말대로 '특검을 거부하는 자, 그가 곧 범인'이다.

할배는, 엄마는, 아빠는 친구들의 투표지를 빼앗으라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본인들의 상황에서 손자에게, 아들에게 최적의 전략을 짜줬을 뿐이다. 물론, 반장이 되기 위해선 용돈이나 간식 말고도 늘 바른생활을 강조했었다.

그래서, 더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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