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표방한 경기 남부 반도체 메가클러스터가 가동 전부터 전력과 용수라는 현실의 벽을 마주하고 있다. 인재와 협력업체를 좇아 수도권에 몰린 반도체 생산시설이 정작 공장을 돌릴 전기와 물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역설에 놓인 것이다.
반면 대구경북을 비롯한 비수도권은 소재·부품·장비 기업, 산업단지, 에너지 기반을 갖추고도 AI 반도체 호황의 중심에서는 비켜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만은 생산·연구·후공정 기능을 각 지역 과학단지에 분산하고, 기업 활동과 근로자의 삶터를 함께 설계하는 방식으로 산업과 지역을 동시에 키웠다.
한국도 반도체 경쟁력을 수도권 집중만으로 유지하기 어려워진 만큼, 대구경북을 포함한 지역 거점을 새로운 성장축으로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인재 탓에 수도권? 반도체 공장 운영이 위태롭다
정부는 2024년 1월 평택·화성·용인·이천·안성·성남 판교·수원을 묶어 경기 남부를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연구 거점으로 키우는 '반도체 메가클러스터' 구상을 내놓았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민간 기업은 2047년까지 이 일대에 약 622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용인 남사에는 삼성전자가 360조 원을 들여 첨단 시스템반도체 국가산단을 조성하고, 용인 원삼에는 SK하이닉스가 122조 원을 투입하는 반도체 일반산단이 들어선다.
문제는 인프라다.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전력과 초순수·공업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한다. 정부는 용인 클러스터 한 곳에서만 10GW 규모의 전력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원전 여러 기에 해당하는 막대한 규모다.
정부는 3GW급 LNG 발전소를 산단 안에 짓고, 나머지 전력은 동해안 원전과 호남권 재생에너지 등을 수도권으로 끌어오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송전망은 경유 지역 주민 수용성, 환경 문제, 보상 문제와 맞물려 쉽게 풀리지 않는다. 용수 역시 팔당댐 잔여 용수와 화천댐 발전용수 등을 활용한다는 계획이 제시됐지만, 관로·취수·정수 시설 구축에는 지자체와 수계 이해관계 조정이 뒤따라야 한다.
수도권에 생산시설을 몰아넣은 뒤 전국의 전기와 물을 끌어오는 방식은 갈수록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송전탑과 환경 부담은 비수도권이 떠안고, 일자리와 부가가치는 수도권이 가져간다는 불만도 커진다. 기존 클러스터를 당장 지방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그러나 앞으로 늘어날 생산시설과 후공정, 소부장 거점을 어디에 배치할지는 별개의 문제다. 반도체 입지 전략을 '수도권 보완'이 아니라 '전국 단위 공급망 설계'로 바꿔야 하는 이유다.
대만 TSMC의 성장 과정은 참고할 만하다. TSMC는 신주에서 출발했지만, 타이난·타이중·가오슝·자이 등으로 생산·후공정 기능을 확장했다. 단순히 공장을 흩어놓은 것이 아니라, 과학단지를 통해 전력·용수·폐수처리·도로·행정·산학협력을 묶어 공급했다. 기업은 공장만 짓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조성된 산업 생태계 안으로 들어갔다.
한국도 변화의 조짐은 있다. 정부는 부산을 전력반도체, 광주를 첨단패키징, 구미를 소재·부품 거점으로 묶는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 구상을 제시했다. 반도체특별법 제정으로 비수도권 클러스터 지정과 기반시설 지원 근거도 마련됐다.
다만 아직까지 지방 거점은 기능별로 흩어져 있고,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앵커기업의 확정 투자와 연결된 지역 성장 전략은 충분히 구체화되지 않았다. 구미가 소부장 거점으로 포함됐지만, 대구경북 전체로 보면 전공정·첨단패키징·테스트까지 이어지는 완결형 반도체 생태계는 아직 과제로 남아 있다.
◆대만·일본은 어떻게 지방을 반도체 거점으로 만들었나
대만 남부 자이현은 사탕수수밭과 논이 펼쳐진 농촌 지역이었다. 그러나 TSMC가 첨단 패키징 공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AI 반도체 후방 기지로 주목받고 있다. GPU와 HBM을 결합하는 첨단 패키징은 이제 AI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병목으로 꼽힌다. TSMC의 CoWoS 같은 첨단 패키징 기술은 엔비디아 등 글로벌 AI 반도체 기업의 생산 일정과 직결된다.
대만 반도체 산업의 출발점은 신주과학단지였다. 하지만 부지, 전력, 용수 한계가 커지면서 생산 기능은 남부와 중부로 확장됐다. 대만 3대 과학단지의 2025년 매출은 약 5조8천억 대만달러로 집계됐고, 남부과학단지는 2조9천705억 대만달러로 3조 대만달러에 육박했다. 대만의 해법은 공장을 무작정 분산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부가 토지·전력·용수·폐수처리·교통·행정·산학협력을 한데 묶은 '과학단지'를 먼저 조성하고, 그 안으로 기업을 끌어들이는 방식이었다.
롄셴밍 중화경제연구원 회장은 이를 "원스톱 숍"이라고 표현했다. 앵커기업이 들어오면 협력업체와 대학, 연구기관이 따라붙고, 지역은 단순한 공장 부지가 아니라 '반도체 도시'로 바뀐다. 대만 과학단지는 기업의 생산 효율뿐 아니라 직원의 주거, 교육, 생활 여건까지 산업 경쟁력의 일부로 보았다. 이 점이 한국의 기능별 산단 정책과 가장 큰 차이다.
일본 구마모토도 전략적 입지 정책의 대표 사례다. 일본은 반도체 산업 쇠퇴를 겪은 뒤 TSMC 유치를 국가전략으로 삼았다. 구마모토현 JASM 1공장은 2024년 양산을 시작했고, 2공장까지 합치면 월 10만장 이상의 12인치 웨이퍼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다. 총투자액은 200억달러를 넘고, 직접 고용은 3천400명 이상으로 예상된다. 일본 정부는 2공장에 최대 7천320억엔의 보조금을 추가로 약속했다.
다만 구마모토는 한계도 보여준다. 공장 유치 이후 교통 정체, 지하수 의존, 주거비 상승, 생활 인프라 부족 문제가 잇따라 제기됐다. 반도체 공장은 유치보다 운영이 더 어렵다. 왕수봉 아주대 교수는 "대만은 산업 경쟁력과 지역 발전을 결합한 전략적 입지 정책을 폈다"며 "앵커기업과 과학단지를 중심으로 인재와 공급망이 함께 축적되도록 만든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방 분산의 성패는 공장 부지가 아니라 도시 설계에 달려 있다. 전력·용수·도로·철도·주거·학교·병원·문화시설이 함께 갖춰져야 인재가 움직이고 기업도 따라온다. 공장만 내려보내는 정책으로는 반도체 산업의 지역 분산이 지속되기 어렵다.
◆공장과 도시를 함께 지어야
정부는 남부권 반도체 혁신벨트 전략으로 부산을 전력반도체, 광주를 AI 반도체·첨단패키징 클러스터, 구미를 소재·부품 거점으로 육성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앞서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와 소부장 특화단지 사업을 통해 용인·평택, 구미, 부산 등도 각각 생산·소부장·전력반도체 거점으로 지정됐다. 올해 통과된 반도체특별법은 반도체 클러스터 지정과 전력·용수·폐수·도로 등 기반시설 지원 근거를 마련했다.
광주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사업은 첨단패키징을 포함한 종합 투자 계획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기존 메모리 반도체 중심의 경쟁에서는 대규모 전공정 팹이 핵심이었다면, AI 반도체 시대에는 HBM, 첨단패키징, 테스트, 전력반도체, 소재·부품·장비가 얼마나 촘촘히 연결되느냐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한국의 첨단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은 각 지역의 기능을 키우는 방향으로 진전되고 있지만, 이를 하나의 공급망으로 연결하는 설계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수도권 생산기지, 광주 AI 반도체·패키징 클러스터, 구미 소부장, 부산 전력반도체가 따로 성장하는 데 그친다면 산업 전체의 시너지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대구경북의 과제도 여기에 있다. 구미는 SK실트론을 비롯한 소재·부품 기업과 산학연 기반을 갖췄지만, 전방산업인 대형 팹과 후공정 앵커시설이 부족해 시너지가 제한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포항의 연구개발·소재 역량, 대구의 로봇·모빌리티·의료·ICT 기반도 반도체 공급망과 연결될 수 있지만, 이를 하나의 전략으로 묶는 설계는 아직 부족하다. 단순히 "우리 지역에도 공장을 달라"는 요구를 넘어, 어떤 공정과 기업, 연구기관, 인재 양성 체계를 연결할 것인지 제시해야 한다.
대만의 과학단지는 팹리스·장비·설계·패키징·테스트·보드·모듈이 서로 연결되는 구조다. 기업 간 협업과 문제 해결이 단지 안에서 빠르게 이뤄지고, 행정 서비스와 비용 지원, 인재 양성, 직원 정주 여건까지 함께 제공된다. 롄셴밍 중화경제연구원 회장은 "과학단지라는 아이디어는 TSMC보다 먼저 있었다"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시스템이 기술기업에 큰 장점이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TSMC라는 세계적 기업은 개별 기업의 성공만이 아니라, 정부가 만든 산업 인큐베이터 안에서 성장했다는 의미다.
한국의 반도체 정책도 이제 개별 특화단지 지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흩어진 특화단지와 특별법 클러스터를 하나의 공급망 지도로 정돈하고, 생산시설뿐 아니라 주거·교육·의료·교통까지 함께 설계하는 '반도체 도시' 전략이 필요하다. 대구경북은 구미 소부장 특화단지를 중심축으로 삼되, 포항의 소재·연구 역량과 대구의 산업·정주 기반을 결합하는 종합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반도체 산업의 다음 경쟁력은 더 큰 수도권이 아니라, 전국에 연결된 강한 클러스터에서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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