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학창 시절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자식과 주식 얘기를 거쳐 '퇴직 이후의 삶'이 서사(敍事)의 대미를 장식했다. 생활을 뻔히 아는 처지라 대화는 솔직담백했다. 공통점은 '그냥 쉬고 싶다'였다. 한 친구는 캠핑카를 사서 전국을 싸돌아다니겠다는 포부를 늘어놨다. 여행지에서 허드렛일로 돈을 벌 수도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자연인이다'를 즐겨 보는 친구는 대구 외곽에서 전원생활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또 다른 한 명은 쉼터와 서재(書齋) 삼아 책방을 운영하겠다고 했다. 낭만이 물결치는 생각들이다. 다만 현실이 그 꿈을 허락할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인생 후반부는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라고 한다. 젊을 때 못 이룬 자아실현(自我實現)의 꿈이라 할까? 밥벌이에 내몰렸던 한 인간을 위한 선물이기도 하다.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힐 그린(Thomas Hill Green)은 "자아실현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했다. 젊은 날에는 먹고사는 일이 먼저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고, 부모님을 돌보는 '의무적인 삶'을 살았다. 가정과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 맞춰 달렸다. 가끔 한눈팔다가도 이내 눈길을 돌렸다.
정년퇴직을 앞둔 사람들은 존재론적 질문을 마주한다. 나는 누구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남은 시간은 무엇을 위해 쓸 것인가.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자인 카를 융(Carl Gustav Jung)은 "인생의 오후를 인생의 아침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노후는 경쟁과 성취를 중요시한 젊은 날과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다. 나이가 들면 자신의 내면(內面)과 화해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70세 이상 취업자가 200만 명을 넘었다. 60세 이상 취업자 수도 50대 취업자를 추월했다. 한국인의 실질 은퇴 연령은 72세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노인 고용률(37%)과 노인 빈곤율(40.4%) 모두 OECD 국가 중 1위다. 일하는 노인이 가장 많은데도 가난한 노인이 가장 많은 나라다. 참담한 역설(逆說)이다.
한국인의 노후는 왜 가난할까? 몇 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다. 첫째, 현재 노인층 가운데 국민연금 수급자(受給者)가 많지 않다. 둘째, 자영업 비중이 높아 노후 준비가 부족했다. 셋째, 국가의 노후 소득 보장 체계가 미약하다. 우리나라는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합한 공적연금의 소득대체율이 35~40%다. 적정 노후 소득(70%)의 절반 수준이다. 노후가 불안한 사회다.
은퇴가 또 다른 생존 경쟁의 시작이 됐다. 정년퇴직을 해도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재취업에 성공해도 임금은 보잘것없다. 경력과 무관한 단순 노무직에 종사하는 경우도 많다. 노후는 버텨 내야 하는 시간이 됐다. 50대 이후는 생애주기(生涯週期)에서 험난한 시기다. 부정적인 '생애 사건'이 잇따른다. 정년퇴직으로 사회적 역할이 줄고 경제적 불안이 커진다. 부모의 병이 깊어지거나 부모의 죽음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자신이나 배우자의 질병이 시작된다. 사별의 고통도 겪는다. 삶의 상실이 집중되는 구간이다. 이 와중에 '생계'라는 쇠사슬까지 끌고 다녀야 한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물론 돈이 여유와 행복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행복과 여유는 '마음가짐'이니까. 그러나 생존에 필요한 돈이 없다면, 마음도 궁핍(窮乏)해진다. 개인만의 불행일까. 아니다. 사회의 실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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