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지붕 아래 빛바랜 나무 처마 밑으로 흙벽이 감싸고 있다. 낡은 판자문을 열고 들어서자 지난 세월을 고스란히 품은 풍경이 펼쳐진다. 얽히고설킨 나무 골조와 낡고 오래된 정미기기 곳곳에 뿌연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다. 지금도 성업 중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대들보 상량문엔 '소화 16년'(1941년)이란 문구가 있다. 경북 청도군 영신정미소 모습이다.
영신정미소가 있는 유천마을은 시간이 멈춰선 곳이다. 한때 극장이 들어설 정도로 번성했으나 지금은 쇠락해 영화 세트장을 연상케 한다. 1970년대 풍경을 방부 처리해 보존해놓은 것 같은 모습. 그 풍경을 만나러 청도로 떠났다.
◆역이 있던 마을, 느릅내
유천마을은 청도의 남쪽, 청도천과 동창천이 만나는 곳에 있다. 하천에 놓인 작은 다리 하나만 건너면 경남 밀양시 상동면이다.
'유천(楡川)'은 지명이지만 지도엔 없다. 행정 지명은 청도읍 '내호리'와 '유호리'다. 하지만 주민들에겐 유천마을이란 이름이 더 익숙하다. 유천극장, 유천농협, 유천양조장, 유천국수집, 유천참기름집…. 일대 가게 간판에도 '유천'이란 상호가 넘친다.
마을 이름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유천역'에서 비롯됐다. 옛날 육상 교통로에 설치돼 공문서 전달 등을 담당하던 교통·통신 시설 말이다. 느릅나무가 우거진 하천변에 있다고 해서 '느릅나무 유(楡)' 자에 '내 천(川)' 자를 써서 역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우리말로 하면 '느릅내'다.
고려 때부터 있던 역의 기능은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 유천역으로 이어졌다. 유천역은 사람과 함께 물자가 모여 이동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런 이유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경찰관 주재소와 우체국이 있었고 경북에서 처음으로 사립학교가 생겼다. 항일 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역사적 장소이기도 했다.
농사를 지을 땅이 많지 않아 주민 대다수는 상업으로 생활했다. 3일과 8일 열리던 유천장은 청도장, 밀양장보다 컸고 우시장도 열렸다.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기에 인근 지역에선 보기 드문 극장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는 없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마을은 서서히 쇠락해갔다. 유천역도 2000년 경부선 철로 이설로 2.5㎞ 떨어진 밀양 쪽으로 옮겨져 '상동역'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오가는 이들이 줄면서 가게도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고, 지금은 오일장 명맥마저 끊어졌다. 하지만 이곳엔 여전히 150여 가구에 이르는 주민들이 나이 많은 건물을 터전삼아 삶을 이어가고 있다.
◆유천문화마을로 탈바꿈
마을 입구 유천복합체육센터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600m 정도 이어진 상가 거리를 느릿느릿 걸었다. 마을은 1970년대쯤에서 시간이 멈춰 선 것 같은 모습이다. 마을 중심 2차선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가게엔 오랜 시간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함석지붕에 흙벽을 두른 영신정미소, 사료판매소 간판을 걸고 있는 박공지붕의 옛 양조장, 1990년대에 문을 닫은 유천극장, 돌로 지은 독특한 모습의 구생당한약방, 독학으로 공부해 익힌 기술로 흑백TV를 고쳐줬다는 중앙소리사. 자그마한 철공소까지. 가게 문이 잠겨 들어갈 순 없지만, 겉모습만으로도 누군가 일생을 바친 노고가 느껴져 뭉글한 감동이 인다.
골목으로 이어지는 담장 곳곳엔 지금은 사라진 반세기 전 삶의 모습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추운 겨울 이불을 나눠 덮고서 군고구마를 먹으며 TV를 보는 대가족, 말뚝박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 같은 정겨운 옛 모습이 생생하다. 쥐를 잡자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그린 벽화도 보인다. 오일장이 섰던 길을 걸으며 벽화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놀랐던 건 일제강점기에 문을 열었다는 영신정미소가 아직 정미기기를 돌리고 있는 현역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쉽게도 이날은 일거리가 없는지 기계는 멈춰 있고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유천극장이다. 1967년에 건립되었는데 당시 청도읍의 청도극장과 중앙극장 등과 어깨를 견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한창때는 멀리 청도 매전면 동곡과 경남 밀양에서도 '극장구경'을 하러 올 정도였다. 이후 TV보급으로 점차 관객이 줄어들다가 1990년대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문 닫은 극장은 방치되다가 화재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8년 극장 안에서 놀던 아이들이 불을 내는 바람에 지붕과 내부 일부가 타버렸지만 지금은 반세기 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남아 있다. 간판엔 1968년 영화 '별아 내 가슴에'의 장면과 1969년 영화 '상해 임시정부'의 장면이 그려져 있다. 간판을 걸어놓은 옛 극장 모습을 어찌나 감쪽같이 재현해 놓았는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당장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극장과 정미소 사이 '사료판매소' 간판이 걸린 건물은 원래 양조장이었다. 교통의 요지다 보니 함께 번성한 것이 양조장이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전성기 때는 유천마을에만 양조장이 6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맞은편엔 오누이 사이인 이호우·이영도 시인이 나고 자란 생가가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마당에 전시된 두 시인의 시를 감상한다.
유천마을 상가 거리 서쪽 끝엔 파란색 페인트로 단장한 상록수회관이 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1년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모으고 청년 50명이 직접 지은 건물이다. 이곳에서 유천마을 일정을 마무리한다.
◆새마을운동발상지 청도
유천마을을 둘러보는 길은 생각보다 짧았다. 아쉬운 마음에 '새마을로'란 이름이 붙은 한적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걸었다. 1시간여를 걸어 5㎞쯤 떨어진 청도읍 신도리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공원'에 다다랐다.
1969년 8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은 경남지역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전용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던 중 철로변 주민들이 제방을 보수하는 모습을 보고는 열차를 세웠다. 그곳 주민들로부터 '자발적으로 협동해 좋은 마을을 만들려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대통령은 '바로 이거다'라며 무릎을 탁 쳤다. 이듬해 그는 "이 마을을 본보기로 우리나라의 모든 마을과 국토를 가꾸고 보존하자"며 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했다. 새마을운동의 시작이었다.
당시 대통령이 열차를 세우고 무릎을 탁 쳤던 마을이 바로 청도읍 신도리였다. 청도군이 신도리를 '새마을운동 발상지'로 자처하는 이유다.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공원엔 두 가지 시설이 있다. 하나는 새마을운동의 변천을 기록과 사진 등을 이용해 전시한 기념관이고, 다른 하나는 새마을운동 당시 농촌 모습을 세트장과 소품 등으로 재현해 놓은 '새마을 테마파크'다. 새마을 테마파크는 테마파크란 이름으로 부르기엔 미흡한 점이 꽤 있지만 잘 만들어놓은 말끔한 시설과는 또 다른 감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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