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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의 예술기행] 히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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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으로 둘러싸인 히메지성. 인터넷 갈무리
벚꽃으로 둘러싸인 히메지성. 인터넷 갈무리

◆수많은 세계의 문학관들

빅토르 위고의 집(Maison de Victor Hugo, 파리 보주광장), 프란츠 카프카박물관(Muzeum Franze Kafky, 프라하 말라 스트라나), 헤밍웨이의 집(Finca Vigia, 아바나 샌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도스토옙스키 박물관(Muzeum Dostoyevsky,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라야 루사), 입센 박물관(IBSEN Museum & Teater, 오슬로 헨리 입센가)… 지난 20여 년간 들러 본 문학관들을 떠오르는 대로 적어본다. 셰익스피어, 셰르반테스, 제임스 조이스, 월터 스콧, 마크 트웨인, 루쉰, 잘랄룻딘 루미의 흔적과 생가 그리고 문학관들도 스쳐 지나거나 들렀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집필했던 스타라야 루사의 작은 집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하며, 이란 시라즈의 루미가 살았던 집은 지금 온전할까 싶어 마음이 아리다. 여행은 늘 도시의 얼굴을 먼저 만난다. 어떤 도시는 높은 빌딩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어떤 도시는 오래되거나 허물어진 성곽으로 역사를 들려준다. 그 도시의 여러 얼굴들 중 공원이나 거리 곳곳에 세워진 예술가들의 청동 입상들에 부러웠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히메지성. 인터넷 갈무리
히메지성. 인터넷 갈무리

이웃나라 일본에는 작가의 생가를 비롯한 기념관 600여 곳이 전국에 흩어져 있다. 시바 료타로문학관, 히메지문학관, 와세다대학교의 무라카미 하루키문학관, 다자이 오사무기념관, 나쓰메 소세키기념관, 미야자와 겐지기념관, 가와바타 야스나리문학관, 도쿄와 이사의 마츠오 바쇼기념관 등 짧은 여행으로 다닌 곳만 해도 참으로 많다. 그중 세 번이나 들른 곳은 우지의 겐지모노가타리박물관과 효고현의 히메지문학관이다.

일본은 늘 식비보다 교통비가 월등히 더 드는데 1987년 이후 국유철도 민영화 탓일 것이다. 사철(私鐵) JR서일본선을 타고 내린 히메지역은 한산했다. 곧게 뻗은 도로는 열기에 이글거렸고 잘 정돈된 가로수 길 끝에는 하얀 백로가 날개를 펼친 듯 세계문화유산 히메지성이 우뚝 서 있었다. 일본인들이 '백로성'이라 부르는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아름답다 감탄하고 싶지만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할듯한 죄책감이 밀려온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의 아들 히데요리와 그의 처 센히메가 한때 거주했던 곳인 탓이다. 히메지성은 그래서 세 번의 여행 중 딱 한 번 천수각까지 올라가 봤다. 해서 늘 그러하듯 일본 근대사와 한일관계에 대한 역사 인식에는 비판받아야 할 부분도 존재하지만 다른 이들에 비해 비교적 일본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한 지한파(知韓派) 소설가 시바 료타로 기념실이 있는 히메지문학관으로 가는 버스를 서둘러 탔다.

히메지문학관. 인터넷 갈무리
히메지문학관. 인터넷 갈무리
히메지문학관. 인터넷 갈무리
히메지문학관. 인터넷 갈무리

◆히메지문학관, 물과 빛 그리고 정원

간사이(関西) 출신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히메지문학관 역시 들어서는 순간 노출콘크리트의 담백한 벽과 고요한 물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빛을 만나게 된다. 남관과 북관 사이 펼쳐놓은 잔잔한 물의 공간에선 하늘이 내려와 있어 현실과 사유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 문학이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물은 그 문학을 다시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라는 뜻일까.

문학관의 동선 또한 전시장으로 곧장 들어가는 대신 긴 복도와 계단을 따라 걷게 한다. 걷는 동안 시선은 벽과 하늘을 오가고, 어느 순간 창 너머로 멀리 하얗게 빛나는 히메지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건축에서 늘 강조하는 '걷는 경험'을 문학관에선 풍경으로 다시 겹쳐 보이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북관의 원형 공간은 문학이 한 권의 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듯 이 공간 역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다시 길 위로 이끈다. 삶을 읽고, 빛을 읽고, 바람을 읽고, 끝내는 자신의 마음을 읽으라는 뜻일 테다. 그래서인지 수없이 늘어놓은 책들과 읽혀지지 않는 문자들을 관람했다기보다 누군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한 편의 긴 산문을 듣고 나온 듯한 여운이 남는다.

◆하리마국의 후예 시바 료타로

"어째서 일본인은 이렇게 바보가 된 걸까' 하고 22살 때 생각했습니다. 옛날에는 안 그랬을 텐데. 거기서부터 저의 소설이 시작되었습니다. … 옛날에는 안 그랬을 것이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일본은 여기까지 살아남을 수는 없을 테니까. 쇼와(昭和)로 와서 잘못된 것이 틀림없어. … 그러나 옛날 일들을 잘 몰랐습니다. 35살, 36살 때부터 문헌과 자료를 읽으면서 쓴 소설은 22살 때의 자신에게 부친 편지였습니다. '료마가 간다'도 '언덕 위의 구름'도 그 이후의 작품들도 일본인이란 것은 뭐야가 테마였습니다." 1992년 일본 문화공로자 수상 기자회견에서 메이지(明治) 추앙론자로 알려진 68세의 시바 료타로는 이렇게 말했다.

남관 한켠에 시바 료타로 기념실이 있다. 시바 료타로는 오사카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조상은 히메지 일대인 하리마 지역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고, 문학관은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지역의 역사와 연결해 보여준다. 특히 '하리마다 이야기(播磨灘物語)'를 중심으로 원고와 자료, 삽화 등을 전시하며 시바가 바라본 하리마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조명하고 있다.

시바 료타로는 역사소설을 통해 영웅을 찬양하기보다 시대를 살아간 인간의 선택과 책임을 묻는 작가였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과거를 읽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성찰하게 만든다는 평이 있다. 물론 한일 양국에서 그의 다소 이분법적이며 개인적으로 치우친 역사 인식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나쓰메 소세키, 무라사키 시키부에 이어 일본 국민 선호 작가 3위라는 그의 문학적 성취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히메지문학관이 시바 료타로를 단독의 위인으로 신격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삶을 지역의 역사와 연결하고, 하리마 사람들의 문화와 정신을 함께 소개하며 한 사람의 작가를 통해 지역 전체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문학관이란 결국 한 사람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낸 시대와 공간을 시민과 연결하는 장소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히메지문학관 경내 언덕에 자리한 보케이테이(望景亭) 툇마루에 앉아 오래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에도시대 양식의 일본 전통 가옥과 정원을 복원한 공간으로 다다미방과 일본식 정원, 연못이 있는 고즈넉한 곳이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에서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현대적인 문학관과 공존하는 과거와 대화하는 듯한 묘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이 문학적이란 건가. 하지만 무언가 아쉬움이 계속 남았다. 무엇일까.

무엇일까, 계속 생각하다가 아, 탄성을 질렀다. 세 번째의 방문 동안 이곳에서 마주친 관람객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러다가 깨달았다. 이 멋진 히메지문학관이 도심에서 너무 외진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발 디딜 틈 없이 줄을 서서 관람했던 파리 보주광장의 빅토르 위고의 집이나 프란츠 카프카, 헨리 입센 기념관 등은 모두 도심에 있었다. 물론 나처럼 외국 관람객들이 모두 자국어로 된 작가의 책을 들고 와 스탬프를 찍고, 그 나라 학생들은 근처 공원의 나무 아래 앉아 작가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역시 문학관은 위치와 접근성, 그리고 시민의 발걸음을 끌어들이는 프로그램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히메지문학관이 조용히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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