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저녁. 엄숙하고 조용해야 할 궁정동 안가에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향했고, 그 순간 18년간 이어진 유신체제는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총격 직후 김재규는 시신을 뒤로한 채 육군본부로 향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쐈다는 사실은 숨긴 채 사태 수습을 위한 계엄령 선포를 촉구했다. 그러나 주변 인물들이 상황을 눈치채면서, 김재규는 곧바로 체포됐다.
이듬해 그는 대통령을 시해하고 정권을 탈취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아 형이 집행됐다. 그렇게 김재규는 오랫동안 '정권 찬탈을 위해 대통령을 살해한 내란범'으로 역사에 남았다. 하지만 '내란범'이라는 이름만으로 김재규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0·26 사건과 그를 둘러싼 시대를 다시 들여다봤다.
◆ 폭발하는 불만
당시 18년째 집권하던 박정희의 심기는 편치 않았다. 인플레이션으로 소비자 물가가 18% 이상 치솟고, 경제 성장을 이끌던 노동 계층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불만을 표출했다.
장기 집권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민주화 열기도 거셌다. 위기감을 느낀 박 대통령은 반대 세력의 주축인 김영삼의 총재직을 박탈하고 국회의원직까지 빼앗았다.
시민들은 그야말로 폭발했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부마항쟁'의 시작이었다. 일반 시민들까지 힘을 보태면서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 신임을 잃다
부마항쟁을 두고 정권 내에서 긴장감이 조성됐다. 정권 말 두 사람이 종종 충돌했다는 증언이 전해지고 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강경 대응하겠다"고 주장했다. 김재규 부장은 비교적 온건하게 대응하자고 맞받아쳤다. 두 의견을 들은 박정희는 결국 부마항쟁에 군 병력을 투입했다.
후일 그는 이 순간이 총을 들게 된 이유라고 변론한 바 있다. 그는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의 바람을 부르기 위해서"라며 "부마항쟁을 군대로 진압하자는 박정희를 보며 정권의 정당성을 잃었다고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김재규가 한참 후배인 차지철에게 충성경쟁에서 밀려나 거사를 결심했다는 설도 있다. 김재규는 사관학교 2기 출신으로 박정희의 동기였다. 두 사람 모두 구미 출신인 데다가, 교사로 일한 경력도 같아 마음이 맞았다. 박 대통령은 7살 어린 김재규를 각별하게 챙겼다. 군사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에도 김재규를 요직에 심어두고 가까이 뒀다. 그런 박정희에게 김재규 역시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박정희의 신임을 잃기 시작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철이 꿰찼다. 그는 국정 전반에 개입하면서 대통령 비서실, 중앙정보부와 마찰을 빚었다. 박정희는 차지철의 행위를 묵인했다고 알려져 있다.
◆ 다시 쓰이는 평가
어떤 설이 정답인지 알 수 없지만 최근 김재규의 속뜻을 다시 파헤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김재규 유족이 지난 2020년 재심을 신청해서다. 그들은 김재규의 최후 변론에서 "국민의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내가 혁명을 한 것이다"고 진술한 것과, 절차의 부당성, 직접적 증거 부족을 근거로 들었다.
재심 요청은 지난해 받아들여졌다. 법원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 소속 수사관들이 피고인을 수사하면서 수일간 구타와 전기고문 등의 폭행과 가혹행위를 하였음을 인정할 수 있다"며 재심 결정 이유를 밝혔다.
재심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울린 총성은 47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김재규는 내란범이었는지, 민주화를 앞당긴 인물이었는지. 그날의 총성이 남긴 질문은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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