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코뿔소(Gray Rhino)'란 표현이 있다. 미셀 부커 세계정책연구소 대표가 2013년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몸무게가 2t 안팎인 코뿔소는 멀리서도 잘 보인다. 사람들을 향해 갑자기 달려오기 시작하면 땅이 울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쉽게 비켜서지 않는다. 다가오는 게 뻔히 보이지만 '설마…' 하며 외면하다가 막상 닥친 뒤에야 피해를 입는 위험. 부커는 그걸 '회색 코뿔소'에 비유했다.
이와는 달리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빗댄 '블랙 스완(Black swan)'이란 표현도 있다. 18세기 서구인들이 호주 대륙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검은 백조를 발견한 데서 비롯됐다. 이 발견은 '백조는 흰색'이란 기존 상식을 완전히 뒤엎었다. 두 가지 모두 위기를 설명하지만, 발생 방식과 인간의 태도 면에서 명확한 차이가 있다.
부커는 '회색 코뿔소'의 위험 앞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대응을 다섯 단계로 설명한다. 처음엔 신호를 무시하는 부정 단계로 시작해 위험을 알면서도 결정을 미루는 지연 단계로 이어진다. 상황이 명확해지면 해법을 둘러싼 갈등을 빚고 시간은 흘러간다. 코뿔소가 코앞에 닥치면 그제야 패닉에 빠진다. 마지막엔 위기에 맞서거나 처참하게 짓밟히는 결과로 갈린다.
지난달 26일 히말라야 산악지대인 네팔 북부 라수와 지역에서 대규모 홍수가 발생했다. 이 홍수로 인한 사망·실종자는 지난 8일(현지시간) 기준 7천 명을 넘어섰다.
참사 원인을 명확히 밝히는 데엔 다소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다만 수많은 전문가는 기후변화, 다시 말해 산업화 과정에서 배출한 온실가스가 지구 기온을 상승시킨 효과가 그 배경에 있었을 것이라고 지목한다. 빙하가 무너져 내린 원인을 직접적으로 규명하긴 어렵지만, 지구 기온의 급격한 상승이 고산지대의 빙하와 영구동토층을 녹이면서 재난이 일어날 환경을 만든 것은 거의 확실하다는 얘기다.
기후변화는 예측 가능한 위험이다.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기후변화를 '당장 해결해야 할 나의 문제'라기보다는 '언젠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여기고 있진 않은가. 매년 전례 없는 폭염이나 집중호우 등 기후변화 위협을 피부로 느끼면서도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모습에서, 돌진하는 회색 코뿔소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구온난화는 전 지구적 현안이다. 국제사회도 기후변화협약을 만들어 대응하고 있다. 2005년 교토의정서에 이어 2016년 파리협정이 발효됐다. 그러나 이행은 더디다. 이런 상태로는 기온 상승 속도를 막을 수 없고, 식량·주거·질병 등이 복합적 악영향을 불러올 거라는 경고가 이어진다. 그럼에도 각국의 이행 의지는 너무나도 소극적이다.
머뭇거리는 사이 기후변화는 이제 인류의 생사를 가르는 현실로 다가왔다. 애써 그것을 외면하면 치러야 할 대가가 치명적일 수 있다.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경고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위험을 이제 우리 삶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국가 정책과 국민의 실천이 같은 방향을 향하도록 인식을 전환하는 일이다.
달려오는 회색 코뿔소를 피하는 방법은 위험을 더 크게 외치는 게 아니라, 모두가 그 위험을 '나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 현실적인 방안을 찾고 행동에 옮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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