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다시 보는 한국역사와 문화] 광개토태왕의 국가발전
◆큰 나라를 건설한 광개토태왕의 국가발전 정책과 전략은 어떤 것일까? 며칠전 잊혀진 역사인 고구려의 영토인 만주에 있었다. 1994년부터 매 년, 어떤 해에는 몇 번씩 고구려를 찾았는데 요 몇 년은 국제정세로 인하여 만주를 갈 수 없었다. 요동벌의 산성을 거쳐 수도인 국내성으로 들어갔다. 광개토태왕비와 오랜 만의 해후였다. 벅차오르는 가슴과 함께 애잔함, 때로는 복받치는 감정 속에 분노가 치민다. 21세기 한국사회는 위기에 직면해있다. 세계질서는 새로운 형식으로 전면적으로 재편되는 중이라서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더구나 그 진앙지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까지 가세하는 동아시아 일대이다. 거기다가 북한은 세계에 핵보유국가임을 선언하고, 우리에게는 '적대적 2국가론'을 선포했다. 하지만 체제의 불안정성 때문에 중국은 북한 붕괴시나리오까지 만들어놓은 상태이다. 한국 사회는 경제적으로 위기로 빠져들고, 사회갈등은 공동체의 붕괴 조짐마저 보이는 상태이다. 고구려는 처음에는 동부여에서 적응할 수 없는 추모가 소수 집단을 거느리고 도망쳐 홀본부여에서 토착세력들과 연합해서 힘겹게 시작한 나라이다. 물론 고조선의 영토와 역사, 부여의 문화를 토대로 빠른 시간에 성장을 하고 영토를 넓혔다. 하지만 수도가 적에게 몇 번씩 함락당하고, 임금이 전사하는 등 국가적인 위기를 여러번 겪었다. 그러다가 391년 광개토태왕이라는 18세의 청년 임금이 등장하면서 단숨에 강국으로 발돋움 했다. 이어 아들인 장수왕은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5세기 중에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발전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고구려는 어떤 나라인가? 광개토태왕의 성공적인 정책들은 어떤 교훈을 줄수 있을까? 광개토태왕은 12살에 태자가 되었고, 392년에 18세의 나이로 등극하여 22년간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영토를 넓혔다. 자의식이 강했고, 군사전략에 탁월했으며, 짧은 시간에 고구려를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문화가 발달한 나라로 만들었다. 때문에 역사로부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崗上廣開土境好太王) 등의 위대한 칭호를 받았다. 다만 〈삼국사기〉만이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고 왕으로 격하시켰다. 우리는 '광개토(廣開土)'라는 시호와 광대한 영토 때문에 그를 군사작전에 능한 임금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추구한 것은 논밭 같은 토지나 넓은 땅이 아니라 광범위한 영향력과 다양한 것들의 통일체로서 큰 나라였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태왕이 원대한 꿈과 목표를 실현시킨 고구려 발전정책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정치외교의 중핵(core), 즉 복잡한 동아시아 세계에서 국가들 간의 균형과 조정역할을 확실하게 수행하는 일이었다. 태왕은 국제질서가 다른 상태로 급변해 가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국가발전에 선제적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우선 엄청난 규모의 정복작전과 영토확장 정책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고대사회는 정치, 특히 군사활동이 전체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고, 모든 분야에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릉비문은 그가 즉위 년부터 전사할 때까지 64성과 1400촌락을 공파했다고 기록했다. 나는 그의 전생애를 분석한 후에 그 또는 그 시대 사람들이 '큰 그림(grand degion)'을 그려놓고, 단계적으로 목표를 향해 추진했다고 판단했다. ◆광개토태왕의 북방정책 북방은 요하를 경계로 한 지역, 동몽골 일대, 북만주 일대의 초원과 연해주 일대의 삼림문화 지대를 포괄적으로 포함한다. 종족으로는 부여, 한족 외에 흉노계, 말갈 선비 거란 등을 대상으로 삼았다. 친정군은 북서쪽으로 요동을 넘어서 요서와 동몽골 지역을 가로지르는 시라무렌강 상류 유역까지 원정했다. 적봉 지역 등은 5천500년 전 부터 홍산문화가 발달한 곳이며, 기원 후에는 거란, 선비족 등이 거주하던 지역이다. 고구려는 이 원정의 성공으로 요동지역을 안정적으로 경영하고, 화북에 자리잡은 중국세력들을 군사적으로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중국 지역은 남쪽으로 도망간 동진과 유목종족들이 지배하는 '5호 16국시대'로서 대분열 시대였다. 따라서 고구려는 국가들 간의 분열을 활용할 수 있었다. 또한 서북 방면인 몽골지역에 거주하는 유목 세력들과 연계할 가능성까지 열어놓았다. 따라서 고구려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면서 양 세력을 견제 또는 협공할 수 있는 유리한 입지를 굳혔다. 태왕은 402년에는 또 요하를 건너서 조양 지역의 연나라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고 점령했다. 여기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 만리장성의 종점인 산해관을 거쳐 북경 지역까지 공격할 수 있다. 이어 408년에 후연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왕인 모용운에게 종족의 예를 베풀어 화친을 맺었다. 그는 원래 고구려 사람으로 성이 고씨였다. 요동지역은 경제 전략지구로서 가치가 높은 곳이었다. 사방에서 물자들이 몰려들고 공급될 수밖에 없는 물류거점일 뿐 아니라 생산지였다. 기장, 콩, 조 등 곡식 농사에 적합했고, 넓은 해안가와 섬들에서는 어업이 활발했으며, 소금 생산도 풍부했다. 또한 석재나 철․동․아연 등 지하자원이 풍부했다. 고구려의 안시성이나 요동성, 건안성 지역은 뛰어난 철생산지였다. 대련 위쪽인 금주의 비사성(대흑산 산성)은 고구려의 전방 해양방어체제의 중심성이면서 물류망의 거점역할을 겸했다. 지금도 장산군도의 장해와 광록도에는 광개토태왕이 404년에 쌓은 고려성들이 남아 있다('고구려 산성과 해성연구').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요동만, 서한만, 대동강 하구, 경기만을 잇는 황해 동안의 연근해항로를 확보하고, 서해를 안정된 '내해'(inland sea)로 삼아 영역권화 할 수 있었다. 또한 북쪽으로는 내륙의 유목을 주로 하는 북방경제권과 남쪽으로는 황해북부와 요동만, 발해만을 이용하는 해양물류망을 유기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태왕은 옛 북부여 영토의 주변 지역도 완전히 편입시켰다. 원향을 수복하여 부여정통성을 강화시킨다는 측면도 있지만, 경제적으로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명마 등 가축을 기르기에 적합했다. 광개토태왕은 말을 산동 지역의 남연에게 수출했고, 장수왕은 800여 필의 말을 439년에 송나라에 보냈다. 또한 모피 생산과 수출이 활발해졌는데, 담비가죽(貂皮) 등은 고가의 무역품이었다. 이어 즉위 20년 째인 411년에 친정군을 이끌고 동부여를 완전하게 복속시켜 두만강 하류 유역과 연해주 남부 일대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태왕은 이렇게 지정학적, 지경학적, 지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만주를 장기간에 걸쳐 순차적으로 공격하였고, 명멸하는 북방 국가들을 대상으로 화전양면 정책을 다양하게 구사했다. 그리고 북방, 중국, 그리고 동방이라는 동아시아의 '삼핵'(三核) 또는 '삼극'(三極) 체제의 한 부분을 확실하게 차지하였다. ◆광개토태왕의 남방정책 태왕은 남쪽을 향해서도 외교활동과 군사작전을 빈번하게 전개하였다. 살제로 광개토태왕릉비문에는 남방정책에 관한 기록이 오히려 더 많다. 고구려와 백제는 4세기에 들어와 적대관계로 변모했고, 한 때는 백제가 변경을 침입하는 등 공세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태왕은 즉위하자 마자 7월에 4만의 병력으로 예성강일대와 개경 주변의 석현(石峴) 등 10현을 점령하였다. 10월에는 백제의 최전방기지이고, 해군함대의 주력이 있었을 강화도 북부의 관미성을 20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끝에 함락시켰다. 계속해서 백제를 공격하는 한편 국경지역에 성들을 쌓아 방어를 철저히 했다. 이 전투들은 일종의 복수전이며, 영토를 재탈환하는 전쟁의 성격도 있었다.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고도의 계산된 정치나 경제행위였다. 동아시아 세계가 대분열인 상황 속에서 고구려가 중국세력들과 경쟁하고 유목종족들의 위협을 제거하려면 남부전선의 안정이 필수적이었다. 또한 국제외교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려면 '외교통로의 장악과 관리'는 절대적인 필요성이었다. 그렇다면 백제와는 동맹관계를 유지하거나, 무력으로 점령하여 배후를 안정시켜야 했다. 또한 백제, 신라, 가야, 왜 등이 중국 지역과 교섭하는 해상로를 통제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 모든 나라들의 방해나 간섭이 없이 어느 나라와도 교류할 수 있었고, 육로망과 해로망을 연결하는 교통의 접점을 장악할 수 있는 탁월한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태왕은 북방의 육지영토 뿐만 아니라 남방으로도 진출해야 했고, 해양영토를 확대하는 정책을 실현해야 했다. 우선 가장 필요한 것은 경기만을 장악하는 일이다. 한반도와 함께 환황해권의 역학관계가 결정되는 거점핵이기 때문이다. 선사시대부터 중국지역 남만주지역, 한반도지역, 일본열도를 이어주는 황해연근해항로와 한반도 중부와 산동반도를 연결하는 황해중부횡단항로와 만나는 해양교통의 십자로였다. 또한 한반도 중부지역의 모든 정치세력을 통합하고, 강과 바다로 이어지는 물류시스템을 일원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전략적으로도 요충지였다. 또한 백제, 신라, 왜가 북부중국과 교섭하려면 통과해야 하는 해역이었다. 때문에 고대에는 경기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국제적인 상황과 한반도의 판세가 결정되었다. 태왕은 즉위 즉시 경기만의 주변지역을 공격해 성공을 거두웠다. 6년째 되던 396년에는 보․기병을 활용하여 수륙양면작전을 펼쳐 백제의 항복을 받고,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의 58성 700여 촌을 탈취하였다. 이로서 서해 중부의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대중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했다. 태왕은 이어 신라를 지배하에 두는 정책을 추진했다. 1차적으로는 백제를 배후에서 압박하고, 동해로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신라 또한 백제와 가야의 공격을 막고, 왜의 침략에서 벗어나려면 고구려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태왕은 신라의 실성을 인질로 삼았고, 후에 귀국시켜 왕이 되게 해 불평등외교를 강요했다. 399년에 신라왕이 구원을 요청한 것을 빌미로 400년에는 보병·기병 5만명을 신라 영토로 진격시켰다. 백제의 위협을 원천적으로 붕괴시켰다. 이어 백제·왜와의 관계를 빌미로 임나가라(경남 고령 일대) 등을 공격하고 남해안을 공격했다. 김해는 낙동강 하구이면서 항구도시이다. 그렇다면 남해에서 해양활동을 하고 일본열도의 왜세력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이 때 여려 사요와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고구려군이 일본열도에 상륙했을 가능성이 크다.('고구려 해양사연구') 이렇게 해서 한민족 내부에서는 고구려-신라 대 백제-왜-가야라는 묘한 '축'(軸)이 형성됐고, 이 질서는 동아시아의 복잡한 국제질서와 얽혀갔다. 결론적으로 태왕은 장기적인 관점과 국제관계라는 '큰 게임'(great game) 틀에서 동서남북으로 수천리를 이동하면서 광범위한 정복활동을 전개하였다. 대륙의 남부와 한반도 중부 이북의 거대한 육지영토를 차지하였으며, 거기에다 황해중부 이북과 동해중부 이북의 해양영토를 확보하였다. 전략적인 거점을 곳곳에 확보하여 질서의 기본축(軸)을 세우고, 단계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을 연결함으로써 자국 중심의 거대한 망(net)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는 명실 공히 해륙(海陸)국가로서 동아시아 질서의 삼각축의 하나이면서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그리고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관계 조정의 역할을 맡는 동아지중해의 중핵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전과 달리 '다종족적 국가', '다문화국가'로 변신하였고, 광개토태왕은 이 상황에 적합한 또 다른 정책을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역사학자·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2025-08-24 13:57:42
DGIST, 융합인재교육원 개원… 창의·도전의 인재 양성 본격화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는 학교 연구행정동(R1) 대강당에서 '융합인재교육원 개원식'을 열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고 24일 밝혔다. 개원식에는 이건우 DGIST 총장, 최재훈 달성군수, 김은영 달성군의회 의장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미래 인재 양성을 위한 융합인재교육원의 출범을 축하했다. DGIST 융합인재교육원은 첨단 과학기술 기반의 융합교육을 통해 창의적 문제 해결 역량과 도전정신을 겸비한 차세대 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출범 첫 해에는 달성군이 전액 지원하는 '과학창의학교'를 개교해 지역 학생들에게 DGIST의 우수한 시설과 교수진을 기반으로 차별화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할 예정이다. DGIST 이건우 총장은 환영사에서 "DGIST 융합인재교육원은 단순한 교육 공간이 아니라 창의와 도전의 가치를 실현하는 미래 인재 양성의 요람이 될 것"이라며, "DGIST가 가진 교육·연구 역량을 결집해 학생들이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최재훈 달성군수는 축사를 통해 "달성군이 DGIST와 함께 미래 인재 양성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어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며 "융합인재교육원은 지역 학생들에게 최고의 교육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달성군을 미래 과학도시로 성장시키는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25-08-24 11:27:13
◆대구 달성군(8월 25일 자) 〈6급 승진〉 ▷건설과 김원양 ▷회계과 이우남 ▷청소자원과 장재민 ▷총무과 최선아 〈7급 승진〉 ▷다사읍 금동훈 ▷징수과 김민정 ▷문화예술과 이은지 ▷경제산업과 정하영 〈8급 승진〉 ▷다사읍 기민주 ▷현풍읍 박희주 ▷하빈면 정다경
2025-08-21 17:00:00
대구 달성군시설관리공단, 기상청 '날씨경영 우수기관' 4회 연속 쾌거
대구 달성군시설관리공단은 기상청이 인증하는 '날씨경영 우수기관'에 2016년 이후 4회 연속 선정됐다고 21일 밝혔다. 날씨경영 우수기관 선정제도는 기상정보를 경영활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매출 증가, 비용 절감, 안전사고 예방 등 성과를 거둔 기관을 국가가 인증하는 제도다. 달성군시설관리공단은 지난해 ESG 경영을 선포한 이후 기후변화 대응과 환경경영을 위해 지속적으로 힘써왔다. 특히 다양한 날씨 정보를 활용해 시설 운영과 안전관리 체계를 강화해 온 결과, 매년 안전사고를 10% 이상 줄이며 고객만족도 조사에서 8년 연속 1등급을 유지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행정안전부 주관 경영평가에서 매년 우수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김정화 달성군시설관리공단 이사장은 "기상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ESG 경영과 혁신경영을 강화해 안전과 고객서비스 수준을 더욱 높여가겠다"고 말했다.
2025-08-21 14:31:46
대구 달성군의회, 을지연습 현장 방문해 비상대응 체계 점검 및 상황 공유
대구 달성군의회(의장 김은영)는 18일 달성군청 충무상황실을 방문해 4일 간 진행되는 '2025년 을지연습'의 진행 상황을 참관하고, 훈련에 참여 중인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을지연습은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해 전시 대비 계획의 실효성을 검증하고자 정부 주관으로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되는 훈련이다. 올해 훈련은 18일부터 21일까지 진행된다. 이날 김은영 군의장을 비롯한 달성군의회 의원들은 정은주 달성군 부군수와 함께 훈련 상황에 대한 설명을 청취한 후, 빵과 음료 등 위문품을 전달하며 무더위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 의장은 "을지연습은 군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훈련인 만큼, 실제 상황이라는 각오로 철저히 임해달라"고 당부했다.
2025-08-18 16:17:35
[김수지의 조선후기 당쟁사]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정조의 '금등지사'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 미치광이 살인마로 묘사된 사도세자 영조가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계승자 사도세자를 제거한 것에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엎치락 뒤치락하는 각 당파의 당쟁 과정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인 맥락을 거세하고 '사도세자가 죽을 만한 짓, 죽어 마땅한 짓'들을 저질러서 영조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일 수 밖에 없었다며 가해자를 변호하는 얘기들이 있다. 세자가 죽은 뒤에, 사실은 세자가 반란을 준비했었다는 증거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세자가 만들었다는 토굴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무기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또, 세자가 대궐 주변 상인들에게서 돈을 빌려서 영조가 대신 갚아주었다고도 한다. 정신이 분열된 상태에서 세자가 환관과 궁녀들을 마구 잡이로 살해한 살인마 였다는 얘기도 있다. 이 모든 얘기들은 세자가 죽을 짓들을 해서 영조가 선택의 여지 없이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로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이 논리들은 전형적으로 가해자를 정당화 시키기 위한 논리일 뿐이다. 토굴에서 나온 무기와 환관과 궁녀들을 죽였다는 기록은 반대로 세자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환경이 얼마나 세자 제거에 몰두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증거이다. 토굴의 무기들은 세자를 제거하려는 세력들에 대항하기 위한 세자의 자구책이었고, 세자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환관과 궁녀는 세자를 모함하고 염탐하는 세력들이 침투시킨 간첩들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세자가 민간에서 돈을 빌려 영조가 갚아줬다는 것이 세자의 인격이 개차반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되곤 하는데, 그 또한 사실과 다르다. 영조는 화협옹주가 죽었을 때도 옹주가 민간에게 졌던 외상을 갚아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들은 모두 세자 살해에 가담한 측들에 의해 유포된 얘기들인데, 이런 종류의 분야에서 선두에 있는 것이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환청과 환시를 겪을 정도의 정신분열 정신착란 상태였다고 썼다. 혜경궁 홍씨가 쓴 이 책 '한중록'이 조선시대 한국어인 국문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주로 조선시대 한국어를 연구하는 국문학과를 중심으로 사도세자에 대한 모욕과 험담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혜경궁 홍씨는 정신이 미친 남편을 불가항력으로 잃고 험한 세월을 견디며 이겨온 불운하나 역경을 이긴 지고지순의 드라마틱한 궁중 여인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 '한중록'을 근거로 심지어 2015년에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사도'가 만들어져 개봉되기도 했다. 역사적 사건에 각 자의 주관을 곁들인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탓할 순 없지만, 적어도 '한중록'이라는 기록은 가해자가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록이라는 것을 환기할 필요는 있다. '한중록'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정조 사망 후에 쓴 부분이다. 혜경궁 홍씨가 정조 사망후에 쓴 부분은 손자인 순조에게 자신의 친정인 홍씨 집안을 복권해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쓴 것이다. 영조 사망 후 즉위한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세력들 중 일부를 숙청했는데, 그 중에 홍씨 집안이 있었다. 혜경궁 홍씨가 순조에게 순조가 몰랐던 얘기들을 알려주겠다면서 쓴 부분이 사도세자에 대한 험담이었다. 만약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 끝끝내 손자에게 알려주지 말았어야 할 얘기 아닌가.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정신병자이고 살인자였다고 고자질하는 할머니라니, 이것이 상식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의 '금등지사'(金縢之詞), 아버지를 죽인 세력을 다루기 위한 협상카드 '금등'이란 고대 중국 고사에 등장하는 금속으로 봉한 상자라는 뜻이다. 고대 주나라 무왕이 중병에 걸려 투병하고 있을 때 무왕의 동생 주공은 자신이 무왕 대신 죽겠다는 기도를 하고 기도문을 써서 금등에 넣어두었다. 후에 무왕이 죽고 무왕의 아들 성왕이 즉위를 했는데, 나이가 어려 주공이 섭정을 했다. 그런데 주공은 무왕을 독살했다는 모함을 받고 낙양으로 피신한다. 그러던 중 성왕이 주공의 금등을 발견하여 주공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이렇게 금등에 얽힌 이야기를 '금등지사'라고 한다. 이러한 고대 주나라의 금등지사가 조선에서 영조의 금등지사로 재탄생한다. 내용은 이렇다. 영조가 아들을 죽인 후에 사도세자가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고, 그래서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다고 쓴 글을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겨 간수해놓았다는 것이다. '정조실록' 정조 17년 8월 8일 기사에는 정조가 영조의 금등지사를 적은 종이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다. 정조가 대신들에게 보여준 영조의 금등지사는 영조가 직접 쓴 원본이 아니다. 정조의 말에 의하면 정조가 영조가 쓴 원본을 보고 원본에 있는 글귀들을 그대로 베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조가 정말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는 글귀들을 썼는지는 정조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대신들은 왕인 정조에게 거짓말 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조가 사실 여부가 불분명한 금등지사 얘기를 꺼낸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정조는 즉위후 정계 개편을 위해 숙종때 실각한 이후로 정계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던 남인들을 키웠다. 정조의 지지세력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오랜 과정을 거쳐 정조 17년 5월 25일에 남인 영수 채제공(蔡濟恭)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그런데 채제공이 영의정으로 임명된 지 사흘만인 5월 28일에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관련자들을 역적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받고 정조는 진노하며 채제공에게 상소를 돌려주며 무마하려고 했지만,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채제공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점점 더 들끓었다. 정조는 일단 채제공을 파직시킨 후에 노론 벽파들을 진정시켰다. 임오화변 이후 노론은 다시 크게는 벽파와 시파로 갈라진다. 벽파(僻派)에서 '벽'(僻)은 임금 벽이고 그 임금은 영조를 말한다. 즉, 벽파란 진짜 영조편이라는 뜻이다. 사도세자를 죽인 몸통은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였다. 따라서 '벽파'란 영조가 아들을 죽이는 것을 부추기고 위대한 결단을 내린것이라고 칭송하는 당파를 말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시파(時派)는 벽파 입장에서는 시류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입장을 바꾸는 일종의 기회주의와 같은 행태를 이르는 말이었다. 벽파에 비해 시파는 당연히 사도세자에게 더 온정적이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정치적 기반인 벽파와 손을 잡고 즉위했다. 사도세자 사후에 영조는 정조를 일찍 죽은 영조의 첫 아들 효장세자의 법적 아들로 입적시켜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의 신분을 세탁해주었다. 정조가 벽파를 배신한다는 것은 할아버지 영조를 배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조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벽파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 즉, 벽파를 집권 세력에서 몰아낸다는 것은 동시에 스스로 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것이었다. 이랬기 떄문에 정조는 즉위후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는 모든 상소를 내치고, 상소를 올린 사람들을 모두 귀양보내는 등의 처벌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정조가 금등지사 얘기를 꺼낸 것은 채제공을 파직시켰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노론 벽파들의 원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정조 17년 8월 8일의 기록에는 채제공이 도승지 시절에 영조가 채제공만 불러서 비밀리에 어서(御書) 한통을 주고 간직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이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이미 영조가 썼다는 금등지사의 글귀들을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정조가 보고 베꼈다는 금등지사 글귀들을 대신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정조가 말하길, 채제공이 선왕의 숨은 뜻을 혼자 알고 있었고, 이제 영의정이 되었으니 선왕의 뜻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이기 때문에 상소를 올린 것이라며 정조는 채제공을 감싼다. 이렇게 정조는 채제공에게 파직 이외에 더 큰 처벌을 해야 한다는 노론 벽파들의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금등지사 얘기를 꺼낸 것이다. 정조가 금등지사 얘기를 꺼낸 것은 정조의 통치 기조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하면서 즉위했는데, 이것은 아버지를 죽인 세력들에게 그 죄를 묻지 않겠으니 정조가 추진하고자 하는 여러 개혁 정책들에 협조하라는 정치적인 메시지였다. 사람된 도리로 친부인 사도세자를 추승하고 제사를 지낼 것이니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정조가 추진하는 왕권 강화 개혁정책들에 협조를 하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가기 위해 음모와 협잡을 벌였던 너희들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금등지사도 그런 의미로 거론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11세때 아버지를 잃었는데, 너희들이 나의 아버지를 죽인 일들을 정치적인 반역죄로 몰고가는 일을 하지 않겠으니, 너희들도 왕의 일에 협조해라'라고 하는 이런 금등지사 카드가 노론 벽파들에게 잘 먹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조가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지간을 이간질하여 최악으로 몰고간 세력들의 면면과 그 행위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조는 11세 이후 24세에 즉위하기 까지 또 즉위한 후에도 숱한 암살 시도와 위협을 겪었다. 정조 16년 5월 22일자 기록을 보면 아버지를 죽인 세력들을 정조는'피맺힌 원수'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세자를 수원 화성으로 이장할 때 정조는 부친의 묘를 맨손으로 끌어안고 울었는데 실록에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 죽였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그 세력을 처벌하지도 못하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국사를 논하고 개혁을 이루려고 했던 사람이 정조였다. 조선 전기의 성군이 세종대왕이라면 조선후기의 성군은 정조대왕이다. 만약 정조가 50세도 채 안된 48세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지 않았고, 추진하던 각 종 개혁정책들을 완수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는 그 해에 정조가 죽고 조선은 바로 이른바 몇몇의 권문세가들이 정권을 잡고 휘두르는 공정과 상식, 원칙이 사라진 세도정치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누가 정조의 의문스러운 죽음에 관계되어 있는지는 각 자의 판단 영역이지만, 최소한 정조의 죽음으로 거대한 이권을 챙기고 조선을 망하게 하는 쪽으로 가게 만든 세력들과 그 세력들을 옹호하는 논조로 연구하는 학계가 정조의 죽음을 두고 왈가부가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의문은 지울 수가 없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25-08-17 13:19:16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43>닭에서 치킨까지 (中)대구 프라이드치킨의 역사
◆대구 프라이드치킨의 어제와 오늘 어느 날부터 '달걀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그 사이에 1960년대를 쥐락펴락했던 영양센터표 '전기통닭시대'가 도래한다. 그 시절 아버지는 지금과 달리 나름 가부장의 권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월급이 은행계좌로 자동이체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금융실명제 이전이었고 다들 누른 월급봉투에 들어간 두툼한 현금을 으스대며 아내에게 내밀었다. 그런 날 대한민국의 아버지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전기통닭과 함께 귀가했다. 고소한 기름내가 방안 가득했다. 닭기름이 번진 갈색 종이봉투의 식감! 동봉된 깨소금을 찍어 한입 베어 문다. 그 놀라운 맛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전기통닭 1970년대 시장표 가마솥통닭은 훗날 프라이드치킨 시대의 산파역이 된다. 그보다 앞서 튀김닭의 변화에 크게 기여한 건 단연 전기통닭이었다. 요즘 그 연장에 서 있는 오븐형 통닭차가 거리를 누비고 있다. 1961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충무로 1가 42 사보이호텔 후문 근처, '명동 영양센터'가 한국 전기통닭의 효시다. 영양센터는 '통닭센터'였다. 당시 야유회 먹거리로 이 통닭이 딱이었다. 60년대 후반 동성로에 여러 업소가 우후죽순 들어선다. '서울영양센터'를 필두로 중앙네거리 동북쪽 모퉁이에 '백마강 영양센터', '백만인', '신서울', '뉴서울', '주부센터' 등이 가세한다. 향촌동 '주부센터'는 전기통닭을 도시락 형태로 팔았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생전 단골이었던 서울 반포에 있는 동네 치킨집 '반포치킨'은 1977년 영업을 시작해 '전기구이 마늘치킨'을 별미로 팔았는데 퓨전 전기통닭의 전통이랄 수 있다. 하지만 전기통닭의 위력은 1971년 급전직하로 추락하게 된다. 식용유 때문이다. ◆식용유 시대 개막 우리나라 튀김닭의 원조인 '통닭'은 서양에서 유래한 치킨 조리법과 유사하나, 닭을 토막 내지 않고 통째로 튀긴다는 점과 튀김옷의 질감 등에서 차이가 난다. 사용하는 기름도 물론 다르다. 19세기 조선후기 학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참기름으로 통닭 튀기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듯 주로 식물성 기름을 사용했다. 우리 선조들은 밀가루, 간장, 참기름, 식초 등이 가미된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지진 닭을 '포계'(炮鷄)라 했다. 인천에서 발생 된 닭강정에 가깝다. 일명 '구운 통닭'으로 불린 전기구이는 기름기가 빠져 껍질이 고소하고 살이 쫄깃해 한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전기통닭 시대도 저물고 있었다. 새로운 식품이 1971년에 등장한 탓이다. 바로 동방유랑에서 생산한 '해표 식용유'였다. 이로 인해 '튀김 전성시대'가 열린다. 해표는 미국 콩으로 만드는 기름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을 공략하기 위해 마케팅을 활발하게 벌였다. 학생 가사실습에 무상으로 식용유를 제공하고, 주부들에게도 무료 견본을 나눠줬다고 한다. 이렇게 생겨난 식용유 시대는 튀김을 가능하게 했고 프라이드치킨에 익숙하게 된 계기가 된다. 프라이드치킨은 초기에는 동물성 쇼트닝을 사용하다가 급격히 유행을 타던 시점에는 '안전한 먹거리 캐치프레이즈' 영향으로 식용유로 바뀐다. ◆딥프라이드치킨 등장 금상첨화로 70년대 말 미국산 압력튀김기가 출시된다. 프라이드치킨을 프랜차이즈로 사업화 한 브랜드는 1977년 서울에서 등장한 '림스치킨'이다. 서울 신세계백화점 지하에 입점하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튀긴 닭과 맛이 달랐다. 요즘의 크리스피치킨 스타일이라 그 맛에 길들여지지 않은 대중한테 크게 어필될 수가 없었다. 그 치킨은 엄격하게 말해 이건 '미국식 프라이드치킨'이지 한국형은 아니었다. 한국 프라이드는 물반죽을 사용한 '엠보 스타일', 미국 프라이드는 가루반죽을 사용한 '크리스피 스타일'이라 맛이 텁텁해 히트 치기 어려웠다. 흥미롭게도 우린 닭 앞가슴살을 가장 싫어하지만 미국에서는 앞가슴살만 챙긴다. 19세기 미국 남부에서는 백인 농장주들이 닭을 먹을 때 목이나 날개 등 뼈가 많은 부위를 잘라내고 몸통만 오븐에 구워낸 '로스트 치킨'(roast chicken)을 많이 먹었다. 노예들은 농장주가 버린 닭의 부위를 모아 목화씨로 짜낸 면실유에 넣어 튀긴 다음 이를 조각내 뼈째 씹어 먹었다. 백인이 먹은 닭살은 '화이트 미트'(White meat), 흑인이 먹은 건 '블랙 미트'(Black meat)라 했다. 흑인들의 허접한 튀김닭, 그걸 식품사학자들은 '딥 프라이드 치킨(deep fried chicken)'이라 했다. 사실상 우리가 먹는 프라이드치킨의 효시다. 세계적 프랜차이즈 회사인 '켄터키 프라이드치킨' 1호점이 서울 종로에 문을 연 것은 1984년. 미국인 '커널 샌더스'가 닭고기를 기름에 튀기는 조리법을 개발한 뒤 미국 내 1호점을 차린 것이 1930년,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한국에 상륙한 것이다. 1979년 롯데리아에서 조각 치킨을 선보인다. 연이어 1980년대 초부터 중소규모의 프라이드 치킨집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이 무렵 대구에서 태동한 두 브랜드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한국형 프라이드치킨의 새역사를 쓴 대구의 대표주자는 바로 '맥시칸'과 '교촌'이었다. ◆맥시칸과 교촌치킨 한국의 프라이드치킨 프랜차이즈의 뿌리는 단연 대구였다. 간장프라이드치킨과 양념프라이드치킨으로 대별되는 데 이 두 기술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두 대구에서 탄생된다. 1978년 '대구통닭'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간장프라이드치킨'을 개발한다. 프라이드치킨에 간장소스를 발라 만든다. 간장소스는 진간장(왜간장)을 주재료로 하여 검은색을 띠며 거기에 설탕, 마늘 등을 첨가하여 만든다. 간장을 사용하여 짠맛이 강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설탕, 딸기잼 등을 섞어 짠맛이 가려지고 달짝지근한 편. 그 기술을 새로운 방식으로 벤치마킹한 건 1991년 구미에서 차린 교촌치킨이다. 대구통닭은 2005년까지는 대구에서 유명한 통닭집으로 알려져 있다가 그 후 프랜차이즈화 된다. 1978년 효목동 '계성통닭'으로 시작 85년부터 본격화된 '맥시칸'. 한국 양념프라이드치킨의 대명사이다. 그 산파역은 '대구의 치킨할아버지'로 불렸던 윤종계(작고). 그의 집안은 '치킨패밀리'다. 5형제(종원, 종정, 종규, 종계, 종보)가 모두 닭 관련 사업에 종사한다. 선친은 서문시장 닭전거리에서 20여년 사업을 했다. 그는 85년 효목동에서 계성통닭, 이듬해 맥시칸을 출시한다. 동시에 시류를 몰기 위해 국내 최초로 닭고기 TV광고를 선택한다. 맥시칸은 간장을 사용한 대구통닭과 달리 물엿, 고춧가루 등을 사용한 최초의 붉은 양념소스와 염지법을 도입해 신드롬을 일으킨다. 그리고 단촛물에 담아낸 치킨무도 개발한다. 그 맛은 '신천지의 맛'이었다. 너도나도 체인점을 요구했다. 그는 로열티도 받지 않고 심지어 레시피까지 공유해버렸다. 그 결과 1천700여 개의 체인점을 낸다. 양념프라이드는 어떻게 탄생한 걸까? 처음에는 맛이 퍽퍽할까 봐 김치를 생각하는 등 여러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동네 할머니가 물엿을 넣어보라고 해서 넣어봤는데 '이거구나' 싶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양념치킨이다. 식어도 먹을 수 있게 개발됐다. 맥시칸과 한국 유통닭의 대명사인 (주)하림은 공생관계였다. 맥시칸이 하림의 닭 30% 이상을 구매해주었다. 하지만 맥시칸은 롱런 못하고 2003년쯤 문을 닫고 만다. 맥시코의 브랜드는 하림이 가져갔다. 하림의 김홍국 회장이 옛정을 생각해 윤종계에게 '윤치킨'으로 재기할 수 있는 종잣돈을 건네기도 했다. 현재 그의 동생이 대보 C&F를 차렸고 그 공장에서 염지된 닭은 현재 지역에 6개 체인점을 가진 '통큐치킨'에 납품되고 있다. 전성기 시절, 맥시칸의 영향을 받은 업체만 해도 70여 개가 넘었다. 맥시칸이 키운 초창기 대구 프라이드치킨 6대 강자는 페리카나, 멕시카나(89년), 처갓집(88년), 이서방(89년), 스머프(89년) 등이다. ◆별별 프라이드 이후 별별 프라이드치킨이 다 등장한다. 호식이는 한 마리 가격으로 두 마리를 먹을 수 있는 마케팅을 전개했고 땅땅치킨은 '뼈없는 바비큐치킨' 시대를 열고 재차 치킨 다변화를 위한 문화복화공간인 '땅땅랜드'를 오픈한다. 이어 별별치킨은 핫소스, 치킨에너지주식회사는 부위별 메뉴를 개발했다. 닭가슴은 샐러드, 날개는 간장, 허벅지는 오븐구이, 닭발은 불닭발 식으로 부위별 특화요리법을 궁리한 것이다. 프라이드치킨은 10년 전부터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한 가성비 짱인 '옛날통닭'의 도전장을 받게 된다. 만수통닭, 앞산옛날통닭, 빅대디 등 20여개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다. wind3099@hanmail.net
2025-08-15 04:30:00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은 14일 오후 2시 대학본부 컨벤션홀에서 '2025년도 후기 학위수여식'을 열고 박사 55명, 석사 47명, 학사 52명 등 총 154명의 졸업생에게 학위를 수여했다. 이번 학위수여식은 졸업생, 가족, 교직원 등 약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건우 총장의 식사, 특별 연사의 축사, 졸업생 대표의 소감 발표가 이어지며 졸업생들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했다. 이건우 DGIST 총장은 "리더십은 직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강조하면서 졸업생들에게 "세상을 바꾸는 리더가 될 것, 배움을 멈추지 않을 것,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을 당부했다. 이날 특별 연사로 초청된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DGIST 졸업생 여러분 앞에는 '당찬 외길 인생'과 '통섭인의 삶'이라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 우선 스스로를 성찰하고, 그에 걸맞는 삶을 사시길 바란다"고 했다. 한편, DGIST는 혁신적 융복합 교육과 연구 중심의 인재 양성 체계를 통해 개교 이후 현재까지 약 2천8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국내외 학계, 연구소, 산업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기술 리더로 성장하고 있다.
2025-08-14 16:55:45
(사)한국후계농업경영인 달성군연합회(회장 김광준)는 12일 경주 웨딩파티엘에서 연합회 회원과 가족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25회 달성군 후계농업경영인 대회'를 열었다. 올해로 25회를 맞은 이번 대회는 '생명산업을 선도하는 달성'을 슬로건으로, 회원들이 직접 기획하고 준비한 행사다. 이날 개회식에는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과 최재훈 달성군수, 농협 관계자 등 주요 인사가 참석해 농업인들을 격려했다. 추경호 의원은 "농업은 단순한 산업을 넘어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근본적인 활동이며, 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축"이라며, "농업인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며, 농업인 여러분의 노고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고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최재훈 달성군수는 "달성군 농업인들의 열정과 땀이 우리 지역 농업을 지켜내고,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고 있다"며 "군에서도 안정적인 영농 기반 조성과 첨단 농업 육성을 위해 다각적인 지원을 이어가겠다"고 했다.
2025-08-12 15:12:03
[의정외전] 신동윤 대구 달성군의원 "군민의 목소리를 가까이에서 듣고 푸는 책임지는 의원이 되겠다"
대구시 달성군의 인구는 약 27만명(올해 5월 말 기준)으로 전국 군(郡) 단위 지방자치단체 중에서 가장 많다. 이런 달성군에서도 다사읍의 인구는 9만명이 넘어 웬만한 군(郡)보다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런 만큼 주민들의 민원 전화는 끝이 없다. 대구 달성군의회 신동윤 군의원(국민의힘, 다사읍·하빈면)의 휴대전화도 그칠 줄 모르고 울린다. 제9대 후반기 경제건설위원회에 소속돼 맹활약 중인 신 군의원은 전반기 부의장직을 맡은 경험을 바탕으로 ▷각종 인프라 확충 ▷환경 및 안전에 대한 제도적 장치 마련 ▷지역경제 활력 제고 등 일상과 밀접한 정책들을 중심으로 군민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신 군의원의 이러한 정치적 신념은 각종 조례 발의와 5분 자유발언, 예산안 심사 등을 통해 하나 하나 실천하고 있다. 특히 ▷소상공인 지원 조례 ▷보건소 및 보건지소 운영 조례 ▷이스포츠 진흥 조례 ▷맨발 걷기 활성화 관련 5분 자유발언 ▷개발제한구역 보호와 폐기물 처리 문제에 관한 5분 자유발언 등 군민의 삶과 밀접한 정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덕분에 주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지역 현안 해결에도 적극적이다. 그의 지역구인 다사읍과 하빈면은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지역으로 교통·주거·농업·환경 등 복합적인 과제를 안고 있다. 하빈면은 대구 농수산물도매시장 유치로 발전 가능성이 커졌지만, 동시에 교통 혼잡과 폐기물 처리 문제 등 새로운 과제도 함께 떠안았다. 이에 신 군의원은 스마트 물류체계 도입과 유통 종사자 교육 지원 등 종합적 대응책을 제시하며 선제적 대응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다사읍의 경우 상습 정체구간으로 주민들의 교통 불편이 심각한 다사~성주간 국도 30호선 확장과 관련해 주민과 관계 기관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여 주민 의견이 사업에 반영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신 군의원은 "남은 임기 동안 군민의 목소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제도, 예산과 실천으로 풀어내는 책임지는 의원이 되겠다"며 "다사와 하빈의 다양한 과제들을 책임감 있게 챙기고, 지금까지 추진한 조례와 정책이 현장에 실제로 반영되는지 지속적으로 점검하겠다"고 약속했다.
2025-08-12 14:55:30
달성군청소년센터, 시원한 물축제 '여름 ON, 더위사냥' 운영
대구 달성군청소년센터는 지난 9일 지역 청소년, 주민 400여 명을 대상으로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즐길 수 있는 물축제인 청소년어울림마당 '여름 ON, 더위사냥'을 운영했다. 이번 행사에는 청소년과 유아 전용 워터풀장과 물놀이의 재미를 더하는 워터 슬라이드로 구성된 물놀이장이 메인체험으로 운영됐다. 부대체험으로는 행운을 담은 키링 만들기 등 6종의 체험부스, 물총 맞추기·물풍선 볼링 등 물을 주제로 하는 4종의 놀이부스, 컵빙수, 수박화채, 라면으로 구성된 먹거리 부스와 쉼터까지 다양하고 편히 즐길 수 있도록 마련됐다. 달성군청소년센터 류명구 관장은 "여름, 물, 축제를 테마로 어울림마당을 운영, 청소년이 무더운 방학기간 무기력함을 해소하고 일상 속 활기를 불어 넣는 시간을 마련했다"며 "지역 청소년들의 선호도가 높은 물축제를 청소년센터 고유 축제로 자리 잡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2025-08-11 12:53:19
DGIST '2025 한국화학올림피아드 여름학교' 성료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는 지난 9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주관하며 복권위원회가 후원하는 '2025 한국화학올림피아드(Korean Chemistry Olympiad) 여름학교'를 성황리에 마무리했다고 11일 밝혔다. 이번 여름학교는 국제화학올림피아드(International Chemistry Olympiad)에 참가할 한국 대표 학생을 육성·선발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전국의 고등학교 1·2학년생 90명이 참가해 2주간 열띤 학구열을 펼쳤다. 여름학교에 참여한 고등학생들은 온라인 수업에 이어 DGIST 캠퍼스에 머물며 무기화학, 물리화학, 분석화학, 유기화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이론 교육과 실험을 병행했다. 여름학교 기간 중에는 중간평가와 최종평가가 함께 진행됐으며, 우수한 성과를 거둔 학생들에게는 '2026 한국화학올림피아드 겨울학교' 참가 자격이 주어질 예정이다. 지난 9일 열린 수료식에는 대한화학회 이필호 회장 및 오한빈 총무부회장, 화학올림피아드위원회 정현 위원장, DGIST 은용순 교학부총장 등이 참석해 참가 학생들을 격려하고 수료증을 수여했다. DGIST 은용순 교학부총장은 격려사를 통해 "국제화학올림피아드와 같은 더 큰 무대에도 도전하며, 여러분의 잠재력을 마음껏 펼치시길 바란다"며 "이번 여름학교의 수료가 여러분의 꿈을 향한 든든한 디딤돌이 되기를 바라며, DGIST는 언제나 여러분의 앞날을 응원한다"고 말했다.
2025-08-11 09:25:54
대구시장애인골프협회(회장 손인호·매탑 17기) 스크린골프 친선경기
대구시 장애인골프협회(회장 손인호·매일탑리더스아카데미 17기)는 9일 북구 동아강북점 마실골프장에서 대구시 장애인골프협회 소속 '굿샷 클럽'과 스크린골프 친선경기를 열었다.
2025-08-10 15:32:21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광복 80주년 한일고대사의 뿌리를 찾아서(1)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태평양 서쪽 연안에 위치한 일본열도는 훗카이도(北海道),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규슈(九州) 네 개의 큰 섬과 6천800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한반도의 약 1.5 배에 달한다. 일본과 한반도와의 최단 거리는 200km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가 일본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일본을 가리켜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말한다. 이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마음속으로는 멀게 느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왜 일본은 한국인에게 이처럼 가깝고도 먼 나라가 되었을까.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 우리 민족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특히 1910년 국권침탈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반일감정의 벽을 더욱 두텁게 하였다. 한일관계는 근세사에서 바라보면 넘을 수 없는 큰 장벽과 마주한다. 그러나 고대사로 올라가면 일본은 한국과 혈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형제의 나라이다. 2025년 한국은 일제 강점으로부터 광복된 지 80주년을 맞는다. 한 핏줄로 이어진 형제의 나라가 언제까지 과거사에 발목 잡혀 발톱을 세우고 으르렁대며 살 수만은 없는 일이다. 이제 감정의 벽을 허물고 형제의 우의를 회복하여 미래를 향해 힘차게 전진해야 한다. 그래서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거리도 가깝고 마음도 친근한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왜에서 일본으로 국명을 변경하게 된 배경, 그리고 이어서 일본이 혈연적 역사 문화적으로 한국과 어떻게 고리가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의 원래 국명은 왜국(倭國) '일본서기'에는 일본과 왜국이란 표기가 동시에 등장한다. 왜(倭)는 일본의 고대 민족명 또는 국명이었다. 왜라는 한자의 표기가 7~8세기에 이르러서 화(和) 또는 일본으로 표기가 바뀐다. 왜라는 명칭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산해경' 해내북경이다. "개국은 거대한 연나라의 남쪽 왜의 북쪽에 있다. 왜는 연나라에 속한다.(蓋國 在鉅燕南倭北 倭屬燕)" 연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오늘날 중국 하북성 남쪽에 있던 나라이다. 그렇다면 '산해경'에 나오는 연나라에 소속된 왜는 대륙 동북쪽에 있던 지명으로서 오늘날의 일본열도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서' 지리에 "낙랑의 바다 가운데 왜인이 있는데 나뉘어서 100여 개의 나라가 되었다.(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것이 아마도 오늘날 일본열도의 왜인에 대한 최초의 중국 기록이 될 것이다. '후한서' 동이전에는 왜가 한국(韓國)의 동남쪽 큰 바다에 살고 있는데 그 나라가 100여 개 국이 된다고 하면서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이후로부터 사신이 한나라와 소통한 것이 30개 국가쯤 된다(自武帝滅朝鮮 使譯通于漢者 三十許國)"라고 말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이 존재할 당시에는 왜가 고조선 산하의 한 속국으로서 존재하다가 고조선이 멸망한 뒤로부터 중국 한나라와의 직접적인 소통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왜의 100여 개 국가 중에서 30개 국 정도만 한과 소통했다고 말한 것을 본다면 한무제 시기로부터 왜가 중국과 비로소 소규모적인 차원의 교류가 시작된 것을 보여준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부여전, 고구려전, 동옥저전, 읍루전, 예전, 한전 등과 함께 왜전이 독립적인 조항으로 추가되어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이는 왜의 위상이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크게 격상되어 중국과의 독자적인 교류가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을 반영한다. 남북조시대에 이르면 '송서', '남제서', '양서' 등에 모두 왜국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저들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면서 "자칭 사지절 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육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自稱使持節 都督 倭 百濟 新羅 任那 秦韓 慕韓 六國 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이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사지절(使持節)은 위진남북조 시기에 직접 황제를 대표해서 지방의 군권을 장악하고 행사하던 관직의 명칭이다. 도독(都督) 역시 중국 고대 군사 수장(首長)의 관직명인데 삼국시대에 도독 제도가 처음 생겼다. 그런데 저들 스스로 황제를 대표해서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육국의 여러 군사를 지도 감독하는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고 자칭한 것을 본다면 이때 왜국의 국력은 자신들이 고구려를 제외한 여러 동이 국가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다고 자만심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국력의 대폭적인 성장과 함께 왜국의 자부심은 수(隋)나라 시대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수서'(隋書) 동이전 왜국조항에는 왜국이 수나라에 보낸 국서(國書) 가운데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낸다(日出處天子 致書日沒處天子)"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보낸 사사로운 문건이 아니고 중국 중앙정부 황제에게 보낸 공식 문서 즉 국서에 자신들을 "해뜨는 곳의 천자"라고 말했다는 것은 왜국이 수나라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천자의 나라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왜국(倭國)에서 일본으로 국명을 변경하게 된 배경 한, 위, 진, 남북조시대까지 중국 사서의 기록에 일본이란 국호는 나타지지 않는다. 줄곧 왜로 지칭되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하게 되었는가. 일본 자체적으로는 자신들을 해 뜨는 나라의 천자국으로 인식하며 수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부터 대내외적으로 사용하는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일본의 사서 가운데 언제부터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변경했는지 그에 관하여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중국의 '구당서'(舊唐書) 왜국 일본전에 "그 나라가 태양이 뜨는 곳에 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 하였다.(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왜국이 스스로 그 명칭이 우아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여 일본으로 개정했다(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新唐書)에는 "함형 원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평정한 것을 축하했다. 뒤에 점차 중국의 발음을 익히면서 왜라는 이름을 싫어하여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사신이 스스로 말하기를, '해 뜨는 곳과 가깝기 때문에 그래서 일본이라 하였다'라고 했다(咸亨元年 遣使賀平高麗 后稍習夏音 惡倭名 更號日本 使者自言 因近日所出 以爲名)"라는 기록이 보인다. 함형은 당고종의 연호로서 함형 원년은 서기 670년이다. 668년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는데 일본은 670년 축하사절을 당나라에 보냈다. 거기에 국호를 일본으로 개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당나라 초기에 일본 국내에서 국호개정작업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삼국사기'에도 신라 문무왕 10년(670) 12월 조에 "왜국이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했다. 해 뜨는 곳과 가깝기 때문에 일본이라 하였다고 스스로 말했다(倭國 更號日本 自言近日所出 以爲名)"라는 기록이 나온다. '구당서', '신당서'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검토해 본다면 일본이 왜라는 이름을 버리고 일본이란 명칭을 국호로 사용하게 된 것은 대략 7세기 후반기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란 국호가 중국에서 승인되어 외교상에서 정식으로 사용된 것은 당나라 측천무후가 집권하던 시기가 아닌가 여겨진다. 왜냐하면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이 쓴 '사기정의'(史記正義)에 "무후가 왜국을 개정하여 일본이라 했다(武后 改倭國 爲日本)"라는 기록이 있어 그것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일본은 왜국으로 지칭되던 국명을 왜 굳이 중간에 일본으로 변경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신당서'에 말한 다음 기록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뒤에 차츰 중국의 발음을 익히게 되자 왜라는 명칭을 싫어하여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하게 되었다.(后稍習夏音 惡倭名 更號日本)" 즉 일본인들은 중국과 교류하면서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왜라는 한자의 발음이 왜소(矮小)하다는 왜(矮)자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왜 자는 갑골문에는 나타나지 않고 소전(小篆)에 비로소 보이는데 사람 인(人)자와 맡길 위(委)자를 결합한 회의(會意)자로서 왜(倭)에는 타인에게 순종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일본이 중국과 직접 교류를 통해 점차 중국의 언어와 문자를 이해하게 되자 일본을 지칭하는 한자 표기인 왜자는 발음상으로나 의미상으로 일본의 국호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따라서 일본의 국력과 위상의 격상을 계기로 이를 태양이 떠오르는 나라라는 좋은 의미를 담은 일본으로 국명을 변경하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일본서기' 권 제1 신대(神代) 상에는 대일본(大日本)이라는 기록 아래 "일본을 이곳에서는 야마토라고 한다(日本 此云耶麻騰)"라는 주석이 보인다. 한자로는 일본으로 표기하는 데 일본말로는 야모토라고 한다는 것이다. 대화, 일본은 모두 일본어 야마토의 한자 표기인 셈인데 왜가 야마토에 대한 중국식의 한자 표기라면 대화와 일본은 야마토에 대한 일본인의 자체적인 한자 표기라고 하겠다. 중국인들은 북방의 훈누를 발음이 비슷하지만 나쁜 의미를 지닌 글자를 골라서 흉노(匈奴)라 표기했다. 일본을 왜(倭), 한국민족을 더러울 예(濊), 오랑캐 맥(貊)자를 써서 예맥이라 지칭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중화 중심주의가 반영된 동이족을 경멸하는 호칭인 것이다. 중국이 고대에 일본을 지칭할 때 사용하던 멸칭인 왜라는 표현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태양이 떠오르는 나라라는 뜻을 지닌 일본으로 국호의 한자 표기를 변경하여 사용한 일본의 자주정신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가로질러 흐르는 한강의 한자표기는 한강(韓江)이 아니라 한강(漢江)이다. 한강(漢江)은 한양조선시대 사대주의의 산물인데 아직도 그 명칭을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번 광복절을 기해 한강(漢江)의 한자 표기를 한강(韓江)으로 바꾸겠다는 대국민 선언을 할 것을 제안한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2025-08-10 12:54:30
DGIST 학생창업기업 ㈜유니바, 초거대 AI 확산 생태계 조성 사업 선정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학생창업기업인 ㈜유니바(대표 남명진)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이 주관하는 '2025년도 초거대 AI 확산 생태계 조성 사업'에서 총 2개 과제의 주관기관으로 선정됐다고 DGIST가 10일 밝혔다. 유니바가 주관하는 과제는 ▷단계적 사고 기반 제조·물류 로봇 데이터 ▷분자독성 추론 데이터이다. 특히 '단계적 사고 기반 제조·물류 로봇 데이터' 과제는 총사업비가 13억7천만원 규모의 대형 사업이다. 이 과제는 초거대 언어모델의 핵심 기능인 '단계적 사고'(CoT)를 제조 및 물류 산업에 접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협동 및 물류 로봇이 인지-판단-실행의 전 과정을 자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고품질 학습 데이터셋을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유니바는 이번 과제를 통해 구축할 CoT 기반 데이터셋을 바탕으로 제조·물류 산업 내 자율 로봇 도입을 가속화하고, 언어모델과 비전모델의 산업 현장 적용 가능성을 검증할 수 있는 대표 사례를 만들어 나간다는 계획이다. DGIST 학생창업기업으로 출발한 유니바는 최근 열린 '2025 국제인공지능대전'(AI EXPO KOREA)에서 'AI 우수기업상'인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상'을 수상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기술력과 연구성과를 인정받은 기업이다.
2025-08-10 12:43:20
대구 출신 기업인, 달성소방서에 커피차 보내 소방관 격려
대구 출신 기업인 조용일 유일물류㈜ 대표가 지역사회 안전을 위해 헌신하는 소방관들을 응원하고자 지난 2일 대구 달성소방서에 커피차를 후원해 따뜻한 감동을 전했다. 이번 커피차 지원은 소방관들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조 대표가 자발적으로 기획한 것으로, 시원한 음료와 간식을 제공하며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최일선에서 땀 흘리는 소방대원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조 대표는 "시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언제나 현장을 지키는 소방관 여러분께 작은 정성을 전하고 싶었다"며 "앞으로도 지역사회 안전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시는 분들을 지속적으로 응원하겠다"고 말했다.
2025-08-05 10:27:59
[김용삼의 근대사] 아무도 말하지 않는 병자호란의 비밀
우리 사회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컨텐츠가 다양한 데 비해 병자호란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다. 그저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스런 항복을 했다는 사실 외에 병자호란의 발발 원인은 무엇이고, 경과는 어떻게 되었으며, 그 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속 시원히 말해주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52일 만에 항복, 치욕스런 전쟁 병자호란은 전쟁 기간이 1637년 1월 3일부터 2월 24일까지 불과 52일에 불과했고, 국왕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임진왜란의 7년 전쟁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전쟁 기간이 짧다. 전쟁 개시 불과 52일 만에 항복했다는 것이 사실 믿기지 않는다. 만주 일대에 거주하며 말갈족으로 불렸던 여진족은 금나라·청나라 등 대제국을 두 번이나 수립한 위대한 민족이다. 만주 일대와 중국 북부를 통치하는 동아시아 패권국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금나라는 1234년 칭기스칸에게 멸망 당했다. 한족(漢族)이 세운 명나라는 이들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으로 찢어 분할통치(devide and rule)했다. 여진족은 압록강 두만강 유역 일대에서 조선인과 섞여 살았다. 이성계는 고려왕조를 무너뜨릴 때 여진족의 힘을 빌렸다. 조선 개국공신에 오른 이지란은 북청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진족 족장이었는데, 그의 여진 이름은 퉁두란이다. 조선에 거주했던 여진족 중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은 연산군 시절 왕실 호위대장에 오른 동청례(童淸禮) 장군이다. 명나라에 눌려 지내던 여진족이 동아시아 정세에 파란을 일으킨 것은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 덕분이다. 그는 무예도 뛰어났지만, 상재(商材)에도 밝은 지도자였다. 조선 인삼이 중국에서 비싼 값에 거래되자 누르하치는 조선 인삼 씨앗을 구해 백두산 일대에서 재배하여 명나라로 수출했다. 이를 위해 휘하에 1만여 명의 심마니 부대를 운영했다. 모피 무역에도 뛰어들어 명나라 은의 25%가 누르하치에게 흘러갔다. 누르하치는 이 돈으로 신무기를 구입하여 여진족을 통일했고, 1616년 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후금(後金)을 창업했다. 누르하치가 만주에서 세력을 키우자 명나라는 광해군에게 군대 파병을 요청한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사령관으로 하여 1만 3천 명 병력을 만주에 파병하면서 중립을 지키다 우세한 쪽에 붙으라는 밀명을 내린다. ◆뛰어난 지도자 누르하치 1619년(광해군 11) 3월 만주 사르후(薩爾滸)에서 누르하치군(6만명)과 명·조선 연합군(10만명)이 격돌했다. 전세가 후금 쪽에 유리하게 기울자 강홍립은 싸우다 말고 조직적으로 투항한다. 전투는 누르하치군의 대승으로 끝났고, 후금은 만주 패권을 차지한다. 누르하치는 열린 의식을 가진 지도자였다. 인구 부족으로 곤란을 겪던 누르하치는 투항해 온 조선 병사들을 극진히 예우하여 팔기군으로 정착시켰다. 또 기술자·장인 집단을 우대했다. 이렇게 되자 조선에서 천민 취급받던 장인들이 고향을 등지고 누루하치에게 귀순하여 예우를 받아가며 무기를 만들고 갑옷을 생산했다. 카스트 제도나 다름없었던 조선의 신분·계급 차별이 낳은 업보다. 광해군은 조선의 국왕 중 예외적으로 부국강병을 지향했고, 자주적 실리외교를 추구한 군주였다. 그는 대륙의 명·청 교체기에 노련한 외교를 펼쳐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사르후 전투 4년 후인 1623년 서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 정권이 출범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사대하지 않고 오랑캐 여진족 추장과 비밀 거래를 했다는 것이었다. 외교의 달인 광해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인조 정권은 광해군과는 정반대 행보를 시작했다. 떠오르는 태양 후금을 적대하고, 지는 해 명나라를 섬기는 시대착오적 외교의 결과는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7) 침략이었다. ◆청 태종 홍타이지 즉위식을 망친 조선 사신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홍타이지는 1636년 4월, 만주 선양(瀋陽)에서 청나라를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청 태종이 되었다. 이때 즉위식에 참여했던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은 "우리에게 황제는 명나라 천자(天子) 한 사람뿐"이라며 끝까지 배례를 거부하여 즉위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그들은 청 태종의 국서도 팽개치고 귀국했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즉위식에 재를 뿌린 조선의 무례와 치욕을 잊지 않았다. 만주팔기 기마대가 전격전을 벌이기 위해 결빙기까지 8개월을 기다린다. 1637년 1월 강이 얼어붙자 조선을 응징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병자호란의 발발이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서울을 탈출하여 강화도로 피신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울 포위 작전을 구사했다. 로오사 선봉대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돌파한 지 6일 후 무악재에 나타났다. 오랑캐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마보다 사흘 먼저 서울에 들이닥친 것이다. 강화로 가는 피난길이 봉쇄되자 인조는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농성에 돌입했다. 이때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 진영에서 천연두가 발병하여 난리가 났다. 하루빨리 출병 목적을 달성하고 철수해야 할 상황이 된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항복하면 조건 없이 철군하겠다"라는 유화적 조건을 제시한다. 대신들은 항복하여 백성들 살리자는 화친파(최명길)와 전 백성이 다 죽을 때까지 오랑캐와 싸워자는 주전파(김상헌)로 갈렸다. 인조는 화친의 길을 택한다. 항복 반대 단식투쟁을 벌이던 김상헌은 국왕이 항복을 결정하자 자살한다며 목을 맸으나 가족에게 발각돼 살아났다. 그 길로 김상헌은 고향 경북 안동으로 낙향 은거했다. 1637년 2월 24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삼궤구고두례) 항복 의식을 거행한다. 이로써 지난해 엉망이 되었던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이 완결되었다. 항복한 조선 입장에서 보면 국왕이 오랑캐 추장에게 머리를 조아린 희대의 치욕이었다. 그 결과 인조실록은 삼전도 굴욕을 "정축년에 국왕이 남한산성에서 나왔다"라는 의미에서 '정축하성(丁丑下城)'으로 용어를 세탁했다. 청나라는 철수 과정에서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비롯하여 수많은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다. 야사에는 포로 숫자가 50만이라고 되어 있는데, 학자들은 5만~10만 명으로 추산한다. 광해군은 실리외교로 파국을 피했지만 인조반정 세력은 초지일관 친명, 오랑캐 배척 외교를 고집하다 전쟁을 자초했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 실패는 국가 패망의 지름길이란 교훈을 전해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병자호란이다. 청나라의 다음 목표는 중국 대륙 장악이었다. 그들은 명나라 공격을 위해 인조에게 조선군 파병을 요구한다. 김상헌은 이를 거부하라는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 괘씸죄에 걸린 김상헌은 1640년 선양으로 압송된다. 칠순 노구의 김상헌은 고국을 떠나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라는 시를 남겼다. 이 시가 한 시절 교과서에도 실렸다. 청나라의 압력에 굴복한 조선 조정은 1640년 4월 임경업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여 전선 120척과 포수 4천 명, 사수 1천명, 수군(格軍) 1,300명을 파병했다. 이들이 청군에 소속되어 명나라 공격에 합류했다. ◆명나라 멸망에 일조한 조선인들 1644년 청나라 군대는 산하이관(山海關)을 돌파하여 명나라를 무너뜨렸다. 이때 청군은 병력이 15만에 불과했다. 소수의 청나라 군대가 명나라를 무너뜨린 원동력은 첨단 군사기술을 적극 수용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외부 세력을 수용함으로써 팔기군을 무적의 군대로 키워냈기 때문이다. 이때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청나라 원정군에 참여했다. 청나라 정예부대인 팔기군에는 투항해 온 조선인으로 구성된 '고려 니루'를 편성했는데, '고려 니루'도 청군을 도와 명나라 멸망에 일조했다. 산하이관 전투는 한반도 군대가 베이징에 진입하여 중국 왕조 멸망에 일조한 최초의 사건이다. 국사학계는 이처럼 기념비적인 대사건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들 머릿속에는 소중화 조선이 오랑캐 편에 붙어 명나라를 무너뜨린 것은 씻을 수 없는 불경이란 소중화 사대주의 덕분이 아닐까? 선양으로 끌려갔던 김상헌은 청이 대륙을 차지한 다음해인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다. 이후 김상헌은 효종 시절 북벌의 기운을 타고 영웅이 되었고,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와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은 역적 집안으로 전락했다. 이후 안동 김씨 김상헌 집안에서 13명의 재상과 판서(장관)·참판(차관)이 줄줄이 배출됐고, 순조비·헌종비·철종비 등 왕비 3명, 숙종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나라가 망하든 말든, 백성이 죽어나든 말든 애오라지 주전론을 외친 덕분에 김상헌 가문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주인공으로 오래도록 꿀단지를 빨았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는 여진족이 대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을 현장에서 적나라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서양 선교사 아담 샬과의 교류를 통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가 1645년 귀국했을 때는 당대 최고의 개화 지식인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 인조는 개화 지식인이자 청나라 황실과 두터운 인맥을 확보한 소현세자를 정적으로 취급하여 귀국 직후 독살해 버린다. 독살 이유는 "오랑캐와 너무 친한 죄"였다. 소현세자의 돌연한 죽음 덕분에 조선은 청나라의 부국강병책과 서구의 과학문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상실했다. 소현세자 독살 후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가 소현세자의 동생 봉림대군(효종)이다. 효종은 9년여 볼모 생활로 쌓였던 감정 덕분인지 노론의 우두머리 송시열과 손잡고 북벌론을 주창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다. 문제는 그의 파트너 송시열이 극단적인 소중화주의자, 쇄국 지상주의자였다는 점이다. 송시열은 "위기의 시대에 조선은 아름다운 문장을 지켜내기 위해 국경을 닫아야 한다"라고 외쳤다. 주변국이 해외와 교류 통상으로 국부를 창출할 때 조선은 시대착오적인 쇄국 위정척사의 길로 질주한 결과는 망국이었다. 펜앤마이크 대기자
2025-08-05 04:30:00
▶강봉학 씨 3일 별세. 도우용·경숙 씨 모친상, 우성진(전 메가젠임플란트 부사장·매일탑리더스아카데미 17기) 씨 장모상. 대구상례원전문장례식장 VIP 301호. 발인=6일(수) 오전 8시.
2025-08-04 14:01:19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42>닭에서 치킨까지(상)-치맥의 도시 대구
하느님과 동격이라는 '치느님'. 2002년 한일월드컵 시절 무려 7만 개가 넘는 치킨집이 전국방방곡곡을 뜨겁게 달궈놓았다. 대한민국이 '치킨민국'으로 등극한 듯했다. 지금 미국 뉴욕에서 가장 핫한 월드푸드 중 하나도 바로 'K-치킨'. 닭에서 치킨까지, 지난 세기 동안 숱한 변화를 거듭해 왔다. 계란만의 시절에서 통닭의 시대, 그리고 닭볶음탕, 이어서 삼계탕 신드롬, 재차 닭갈비와 궁중닭백숙과 안동찜닭에 이어 2010년을 넘어서면서부터 별별 프라이드치킨이 '대구치맥페스티벌'로 집결된 모양새다. '치킨춘추전국'이 전국을 치킨벨트로 묶어놓은 것이다. ◆치맥페스티벌 2013~2014년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공전의 히트. 치킨과 맥주의 환상의 궁합, '치맥 신드롬'이 일어난다. 가장 열광한 건 중국. 원래 그들은 치킨 먹을 때 탄산음료를 주로 먹었다. 그런데 씁쌀한 맛이 특징이 한국표 라거맥주는 기름기 많은 치킨 안주로는 딱이었다. 치맥에 가스라이팅 된 중국 관광객이 인천으로 건너와 자잘한 치맥 파티를 벌였다. 그런 형세라면 인천이 먼저 치맥페스티벌을 론칭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흐름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다. (사)한국식품산업협회 사무국장이었던 윤병대였다. 그가 2013년 1회 치맥페스티벌의 밑그림을 그려준다. 교촌과 호식이두마리치킨이 발전의 도약대였다. 3회 때부터 한국치킨산업협회가 조직위를 구성한다. 13회로 이어지는 동안 치킨열차, 에어돔, 두류야구장 잔디깔기,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치맥을 즐길 수 있는 아이스카페, 옥수수전분으로 만든 친환경 컵 등이 등장했다. 가장 흥미로운 이벤트는 1회 때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는 '닭위령제'. 이 아이디어는 들안길 금산삼계탕 전속모델이었던 개그맨 전유성이 냈다. 조직위가 그걸 의미롭게 벤치마킹한 것이다. '주도권을 뺏겼다'라고 판단한 인천도 대구치맥에 영향을 받아 3년 '전부터 맥강(맥주와 닭강정)페스티벌'을 발진한다. 뿐만아니라 서울과 여러 도시에서 치맥페스티벌을 확산시키고 있다. ◆닭의 고장 대구 치맥페스티벌 하나만으로도 대구는 자타공인 '닭의 고장'으로 각인될 수 있었다. 1978~2000년대 대한민국 프라이드치킨 프랜차이즈 리더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대구를 발판으로 도약을 시작했다. 닭. 이놈이 꼭 대구에서만 자랄 수 있는 건 아니다. 닭은 '전국구'. 대구가 닭의 고장이 된 이유는 뭘까? 그렇다면 대구가 닭의 고장이 되려고 하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일단 대구권에서 소비되는 닭의 양이 압도적이고 닭 관련 음식도 특화되어야 할 것이고 부화장, 양계장, 도계장, 가공공장, 치킨점 등 양계 연관산업도 잘 네트워킹돼 있었다. 닭의 기원은 인도와 태국 등 동남아시아 투계의 원조랄 수 있는 '적색야계'. 선조들이 요놈들에게 모이를 주고 가금류로 키워낸다. 닭에 대한 기성 종교권의 거부감은 거의 없다. 힌두교는 소, 이슬람교는 돼지를 금기시한다. 하지만 닭은 아니다. 그래서 닭은 지구촌 대표 음식 재료로 사랑받을 수 있게 됐다. 현재 연 700억 마리 이상이 도계되고 있다. 어원학적으로 볼 때 대구는 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달구벌은 '닭구벌'일까? 어원학자들은 대구의 신라 때 지명인 '달구벌'이 닭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한다. 대구에선 닭을 '달구', 닭똥은 '달구똥', 닭새끼는 '달구새끼'라 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경주시 교동 첨성대와 반월성 사이 숲인 '계림(鷄林)'. 바로 '닭숲'이다. 삼국유사에 계림 관련 결정적인 구절이 나온다. '60년(탈해왕 4년)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반월성 서쪽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옆 숲이 황금 궤에서 나오는 광명으로 가득 차고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어 탈해왕에게 고하였다. 왕이 즉시 이 숲으로 가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있어 '알지', 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이라 하였다'란 대목이다. 불발로 끝났지만 계림의 기운을 존숭하고 있었던 신문왕이 689년 달구벌로의 천도를 시도한 것과 관련 관계자들은 계림과 달구벌이 닭을 매개로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려 든다. ◆대한민국 양계산업 발상지 대구 한국의 가축 중 일반인들이 가장 손쉽게 키울 수 있고 잡아먹을 수 있는 건 단연 닭이다. 혹자는 소와 돼지라고 믿는데 아니다. 지금은 동내 마트에서도 흔한 게 소와 돼지. 하지만 그 시절에는 재산 목록 1호였다. 집안 길흉사 때 겨우 애지중지하던 가축을 도축해 겨우 식용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닭은 한동안 최고의 국민 영양식이기도 했다. 대구는 대한민국 양계산업의 태동지. 일제강점기부터 양계산업구조가 전국에서 가장 탄탄하게 구축돼 있었다. 전국 3대 시장 중 한 곳이었던 서문시장을 비롯 칠성시장, 남문시장 등 사통팔달 형성된 재래시장이 포진해 있어 닭의 수급을 원활케 해주었다. 또한 철도와 도로, 심지어 낙동강 뱃길까지 잘 잘 발달 돼 있어 양계산업이 꽃 필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서 가장 큰 부화장은 어딜까? 바로 북구 산격동에 있었던 '신기부화장'이다. 일제 양계전문가들도 이구동성으로 대구만큼 양계산업 입지가 양호가 데가 없다고 판단했다. 신기부화장을 통해 미국계 닭인 하바드 종자가 1961년쯤 대량으로 이식된다. 이 과정에 한국의 토종닭은 점차 밀려드는 외국닭한테 소외받는다. 이런 징조는 1903년부터 전국적으로 관측된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양계산업의 축은 닭보다는 계란이었다. 카스테라, 자왕무시(일본식 계란찜) 등 일본요리에서 계란이 차지하는 위상은 상당했다. 식민지로 건너 온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밥상을 위해 양계산업 활성화에 힘을 쏟는다. 일본인에 비해 계란보다 닭에 더 익숙해져 있었던 한국인들도 점차 계란을 선호한다. 광복 즈음만 해도 계란은 서민에겐 언감생심. 그런데 6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인의 생활이 서구화되고 식단도 점차 계란 위주로 변하게 된다. 어느 순간 아침 '계란 후라이'는 국민의 반찬으로 등극한다. 삶은 달걀은 사이다와 곁들여 먹던 국민 간식거리자 소풍가는 날의 최고의 먹거리였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말표사이다와 달걀의 매치는 지금도 지울 수 없는 추억의 한 장면이다. 50년대까지만 해도 소시민들의 삶은 기아선상. '양계산업'이란 개념이 싹틀 기미가 없었다. 그래도 백년손님인 사위가 찾으면 씨암탉을 잡았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등장하면서 양계산업도 본격화된다. 1963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양계산업'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1968년에 '대한양계협회'가 결성되고 첫 양계 전문잡지인 '현대양계'도 창간된다. 지역의 양계 1세대인 권진택(성주군에서 '오성농장' 운영)과 송인환(현재 칠곡에서 '성진양계장' 운영), 이들 뒤를 이은 배신국 씨(고령에서 토종닭인 '우리품닭' 집단 사육) 등을 통해 그 시절 얘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양계산업 1번지 범어동 한국 양계산업 1번지는 단연 수성구 범어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범어동과 연결된 황금동권 야산도 70년~80년대초 범어동과 매머드 양계장벨트로 변한다. 현재 그랜드호텔기준, 그 뒤편에 있는 동도초등학교, 호텔 동쪽 맞은편 남북으로 형성된 범어네거리~어린이대공원 아파트촌 역시 대한민국 최대 양계장 섹터였다. 북구 검단동에는 대규모 도계장이 들어섰다. 물론 주요 재래시장에는 어김없이 닭전 구역이 있었다. 60년대 후반 부화장과 양계장을 갖춘 '대구농장'이 수성경찰서 옆에 생긴다. 경주시 안강 출신인 권진택은 68년쯤 수성구 범어2동 그랜드호텔 맞은편 야산에서 세를 얻어 양계장을 꾸민다. 처음엔 5~6개의 선도 양계장이 있었는데 나중엔 60여 곳 이상으로 번져간다. 지금은 수만 수십만 수를 하는 양계장이 수두룩하지만 그때는 다들 영세했다. 그도 처음에는 200~300수의 닭만 키웠다. 병아리를 5개월 정도 키우면 산란계가 되고 그때부터 1년 남짓 계란을 낳게 되고 그 기능을 다하면 '폐계(노계)'가 된다. 이들 노계는 훗날 70년대 대구에서 가장 가열차게 피어올랐던 '닭도리탕(볶음탕)'의 주요 재료로 사용된다. 그가 처음 양계장을 얻었을 때 2~3년 먼저 양계장을 시작한 박세탁도 있었는데 뒤에 영천에서 가업인 '흥생농장'을 차린다. 1975년 기준. 대구 안에 무려 48개의 부화장이 있었다. 대형 양계장도 대규모 부화장이 있어야 가능했다. 가장 큰 건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신기부화장, 이밖에 신일, 수성, 대구, 신성, 칠성 등이 리더군을 형성한다. 수성교 근처에는 대구와 신성부화장이 있었다. 당시엔 요즘 같이 완충력이 뛰어난 계란판이 대중화 되지 않았다. 계란을 팔기 전에 미리 물을 먹여 준비해 둔 짚으로 10개가 들어갈 수 있는 한 꾸러미를 만들었다. 아낙네들은 매일 아침 양계장을 찾아와 갓 나온 계란을 받아 부산의 재첩국아줌마처럼 고무 다라이, 함지박 같은 것에 담아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추억의 닭장열차 대구 부화장의 상당수 산란계는 서울권으로 팔려나갔다. 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자 대구역 한켠에선 시도 때도 없이 닭이 울었다. '닭장열차'를 특별하게 편성한 탓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권 양계사업이 서울과 원활하게 연계될 수 있도록 서울역에 별관 같은 농축산물 진흥관을 설립한다. 그 시절 대구에선 닭똥도 약이 되었다. 동촌 등 인근 능금과수원 등에서는 천연비료로 가장 선호된 게 바로 인 성분이 상당히 많이 포함된 닭똥이다. 당시 양계장 등을 돌면서 닭똥만 수거해 팔러 다니는 장사치들도 적잖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한다. 공해와 오염원은 도심을 벗어나야만 했다.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범어‧황금동은 아파트촌으로 집중 개발된다. 그랜드호텔과 대규모 아파트촌이 들어서면서 하나둘 도심을 벗어나 경산시에 인접한 시지, 매호동 쪽으로 이전한다. 한밤에 불켜진 경산권 비닐하우스는 거의 양계장이라 보면 틀림이 없다. 1980년대 후반부터 축산산업은 쇠퇴의 길을 걷는다. 육계 사육 농가가 소비인구의 밀집과 도시화에 따라 비교적 지가가 싸고 공해와 연료 문제가 적은 전남과 전북, 충북 지역으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이후 대구 양계업계는 가공산업이 아닌 유통산업으로 유턴하게 된다. 이때부터 한국 생닭 유통의 전설로 불리는 〈주〉하림을 축으로 '프라이드치킨' 시대가 개막된다. wind3099@hanmail.net
2025-08-01 04:30:00
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 DGIST 기초학부 특임교수로 임용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유명한 '궤도'(본명 김재혁)가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기초학부 특임교수로 임용됐다. DGIST는 31일 오후 서울 마포구 라이즈오토그래프컬렉션에서 '궤도'의 기초학부 특임교수 임용식을 열었다. 이번 '궤도' 특임교수 임용은 과학기술의 대중적 가치 확산과 함께 DGIST의 융복합 교육 철학을 더욱 폭넓게 실천하기 위한 결정으로, '경계를 넘는 융합형 인재 양성'이라는 DGIST의 방향성과 '궤도'의 철학이 맞닿아 성사됐다. 궤도는 "DGIST는 학부의 경계가 없어서 유연하다. 경계를 넘는 것, 바로 그게 이 시대에 필요한 태도다. DGIST의 무대는 한국이 아니라 지구"라며, "DGIST의 학생들이 ▷전공에 얽매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융합형 인재 ▷과학기술을 넘어 사회·문화·예술과의 연계를 모색하는 창의적 인재 ▷기술을 통해 한국이 아닌, 지구 전체를 무대로 삼는 글로벌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DGIST 이건우 총장은 "DGIST는 '융합형 인재 양성'을 핵심 교육 철학으로 삼고 있으며, 이번 궤도 특임교수의 합류는 단순한 외부 인사의 영입이 아닌 우리 학생들에게 '융합적 사고'와 '세상과 소통하는 능력'을 체감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2025-07-31 1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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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재건의 길(上)] "강한 야당이 보수 살리고, 대한민국도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