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미테랑방한...대한반도 정치소신

프랑스국가원수로서 최초방한하게 될 미테랑대통령은 14일 오후 2시(한국시각) 서울에 도착한다.미테랑대통령의 이번방한엔 한국문민정부의 특성을 고려, 각료진은 물론 비공식수행원들도 지한파인사에다 문화분야 참여명사가 3명이나 포함되어 있다.미테랑대통령은 어디까지나 이번 방한의미를 양국 경협.기술교류등 실익차원에서의 밀월시대도 좋지만 양국민들의 문화와 가치관공유.우의를 접목시키는데 무게를 더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화계인사는 세계적조각가 세자르를 비롯해 유명여배우 소피 마르소, 지한파출판인인 악트쉬드사 니센사장이 방한하게 된다.

이같은 미테랑대통령의 소신은 지금까지 한반도를 보는 그 자신의 행태에서도 극명하게 반영되어왔다.

그는 남북한이 그동안 군부통치와 공산독재정권을 지속시켜온데 대한 불만이지대했다. 따라서 한반도는 그만큼 그의 관심권 밖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고 외교.핵강국인 프랑스에 남북한 양쪽은 서로 그에 따른 외교적 불이익등을받지 않으려고 80년대이후 {추파}를 적극 던져왔다고 할 수 있다.미테랑의 인권철학이 한국측에 의해 굴절되는 상황은 지난80년 광주민주화항쟁에서 극치를 보여주고있다. 프랑스의 {광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당시 남달리 컸다. 미국.일본.독일의 민주시위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못지 않게 프랑스가 보여준 {5.18 유혈진압}에 대한 규탄시위는 한달 이상 파리중심가를뒤흔들어놓았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이 시위대열에 사회당당수인 미테랑이 적극 열성을 보였다는 것은 뒤늦게 새로 밝혀지고있다.

한마디로 미테랑은 70년대 경제기적의 한국경제가 80년대 인권신장의 {정치기적}으로 연계되길 기대했던 소신을 간직했던 것이다. 그같은 바람과 달리군부정권으로 이어지는 강성독재로 한국정치가 발전되자 81년 집권여당이 된사회당과 대통령에 당선된 미테랑은 자신들의 {한국정치의 봄} 기대가 산산조각으로 부숴지는 쓰라림을 맛보아야했다. 그후 86년 한.불수교 1백주년을맞아 한국국가원수로 최초 방불하게된 전두환대통령은 프랑스 언론의 냉담한반응과 {군부독재자 추방}이라는 인권시위의 차가운 질타를 감내해야만 했다.그후 89년12월 방불하게된 노태우대통령은 전대통령에 비해 훨씬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나 집권사회당인사들의 노대통령을 보는 {시각앙금}은 그렇다고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과 미테랑의 관련은 한국에 비해 비교적 순탄한 계기로 출발했다. 80년미테랑이 대통령후보시절 방중후 잠시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김일성은 프랑스에서 사회당집권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미테랑을 붙잡기 위한 {환심사기}에 혈안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파격적 환영행사는 미테랑의 정치철학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완전 역효과를 빚었던 것이다.

미테랑 정치자문역을 거친 르몽드지의 퐁텐느고문은 86년 어느날 미테랑대통령과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외상과 만찬을 함께 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북한의 허구를 미테랑대통령이 지적한바 있다고 했다. "김일성주석의 환영행사일정에 따라 군중매스게임을 구경했는데 수십만명이 동시에 반복된 동작과섬쩍지근한 묘기로 분위기를 압도해 그동안 심정적인 동정론을 막연하게나마간직했던 이 체제(북한체제)에 대한 폭력성과 카리스마적 기질을 체감했다.미테랑의 대북한관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김일성의 초대이후 {시대착오적 정치체제}로 급변했고 급기야 금의 의도인 북한.불수교는 미테랑의 소신변화에 의해 좌절되고만 것이다.

이같은 남북한에 대한 미테랑대통령의 소신은 이번 방한으로 새로운 이정표를 긋게된다고 볼 수 있다.

숱한 민주역경을 딛고 몇차레 대통령후보로서 낙선고배를 마신 김영삼대통령은 어떻게 보면 미테랑대통령이 걸어온 정치역정과 궤를 함께 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더욱이 {군사문화}종식과 {민주개혁}의 기치를 표방한 김대통령의면면에 미테랑대통령은 개인적 호감과 함께 김대통령이 이끌고 있는 한국의장래에도 프랑스가 확고부동의 명실상부한 외교.경제적 보증을 실을 수 있다는 대내외적 자신의 의지를 표방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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