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춤추는 숲(97)

함께 살아온 십수년 동안, 여자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일정하게 보여온 허록이 아닌가. 사실은 오래전부터 동유의 음악적인 의식에 바늘구멍 만한 틈이생기고 이젠 급기야 틀어막기 힘든 구멍으로 커졌다고 여겼던가 보았다. 따지고 보면 그간 동유의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미학적인 음악으로 경도될 때마다제동을 걸어오지 않았던가. 이젠 더이상 비상한 방책을 쓰질 않으면 안될 지경에 왔다고 판단한 듯싶었다. 적어도 의혜의 몸을 앗을 욕심에 자신을 마산에 내려보낸 것이 아님을 동유로서도 명백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이렇게 하지 않고는 널 떼어놓을 수 없어! 동유는 내 아들같은 놈야. 니가사라져야돼... 거둬가겠다고 입을 열란 말야!깨어진 유리창 틈으로 들려오던 말이 쟁쟁하게 떠올랐다. 그의 마음을 알기에 분노를 일으키다 말고 안타까움에 서성이는 것이었다. 소금이 심장을 문지르듯 가슴 쓰라리며. 왜 아저씨는 나에게 끝까지 말로 설득하려 들지 않았던가. 아니, 그녀와의 관계를 살리면서 우리의 음악을 유지시킬 방도는 딱히 없었단 말인가.

그런 이해쪽으로 물꼬를 터서일까. 방을 정돈하고 연습실을 알뜰하게 치우는허록의 모습이 조금씩 그의 분노로 닫혀진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강대상 앞에 보니 전에 없던 난로도 눈에 띄었다.

그의 악기케이스 옆에는 허록의 악보도 단정하게 쌓여있었다. 그와 더불어있은 15년 동안 이만한 정성스러운 손길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그가 열다섯무렵 심한 열병에 사경을 헤맬 때도 그의 손길이 이렇듯 세미한 데까지 미치지 않았었다. 동유는 악보를 펴면서 이 일은 아주 없었던 걸로 할수도 있지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일}을 훔쳐본 사실을 허록이 모르니만큼 자신만 예전으로 돌아가면 모든 관계는 제자리를 찾을수 있지 않겠는가.지상에 반토막 걸린 앞쪽 창문으로 어둠이 내리고 있을 즈음, 동유는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있던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었다. 악보대와 스탠드도 의자 앞으로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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