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재소설-선인장이야기(54)-운명 하나

그렇게 여름날들은 한동안 평온하게 흘러갔다. 나의 하루 생활은 두 서너번의 샤워와 나른한 낮잠, 잡다한 추리 소설을 읽는 것으로 채워지기 일쑤였다.아파트의 베란다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따가운 볕이 내려 쪼이는길 위엔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지열만이 현기증을 불러 일으켰다.그런 모습을 하염없이 내려다 보다가 나는 창이 넓은 모자를 찾아 쓰고 베란다에서 노래를 불렀다. 내가 아는 노래들이 더이상 떠오르지 않으면 아무시집이나 들고 내 마음대로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다 보면 참 여름은 아름답기도 하구나 싶어졌다.

{몸과나래도가벼운듯이잠자리가활동입니다/헌데그것은과연날고있는걸까요/흡사진공속에서라도날을법한데,/혹누가눈에보이지않는줄을이리저리당기는것이/아니겠나요}

아무런 구절이나 이런 식으로 하나 쑥 뽑아내어 노래를 만들어 부르다 보면시집속의 어떤시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어졌다. 평소에 읽기 어려웠던 이상의시들이나 포우의 시들까지도 마치 내가 지은 시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가족들은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는 나와는 달리 제각각 바빠 보였다. 어머니는 새로 여름 커튼과 식탁보를 만든다고 하시면서 재봉틀 앞에 앉아 보기에도시원해 보이는 물빛 아사를 드르륵 드르륵 박으셨다.

미수는 혼자서 제 결혼 준비를 하느라고 바빴다. 또 혜수는 혜수대로 연극에 빠져 있었다.

극단에서 여름 한철을 야외공연으로 채우기로 했다면서 소극장을 벗어나 도심의 공원에서 공연을 한다고 했다. 혜수는 연극 공연 탓인지 약간 야위어 보였다.

준수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바빠 보였다. 미수가 해운대에 갔을 때 만났던여자와 연애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짐작하여 알려 주었다. 통도사에서 우리는 해운대로 차를 몰아 갔는데 준수는 거기서 전에 다녔던 대학 동창생 가족을 만났는데 그의 여동생과 콘도의 찻집이며 바닷가에서 나란히 있는 걸 보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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