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타인의 시간(71)

고샅 입구에 가방을 멘 은유가 서 있었다. 먼저 가라고 전화하지 않는 한,은유는 매일 저렇게 나를 기다린다. 시간이 될 때까지 내 모습이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 집까지 쳐들어온다. 아마 나는 은유 때문에 결석도 못할 것 같다.[승혜야, 빨리 와. 늦겠어]은유가 나를 보자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좀더 걸음을 빨리 했다. 은유를 보니 청량 음료수를 마신 것처럼 힘이 돋았다. 은유가 손을 내밀며 햇살 같은목소리로 말했다.

[잘 잤니?]

응. 나는 은유의 손을 잡으며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유의 손은차갑지만 촉감이 좋았다. 그 깔깔한 촉감이 나의 가슴에 껴붙은 간밤의 찌꺼기들을 살짝 간질였다. 손 끝으로 손바닥의 오목한 부분을 긁듯이 간질여 주면 은유는 기분이 유쾌해진다. 나는 은유의 신체 어느 부위를 어떻게 하면 우울해지고 유쾌해지는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나도 실컷 잤어. 눈이 부었잖니. 엄마한테 야단맞긴 했지만, 상쾌해]은유의 말이 사실인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은유의 눈두덩이 조금 부은 것 같기도 했다. 나도 그래, 하고 말했지만 그 부은 의미가 사뭇 다르다. 나는 언제쯤이면 은유처럼 실컷 자 볼 수 있을까. 제대로 잠을 못 잔 지가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잠의 소중함을 요즘만큼 절실하게 피부에 와 닿은 일도 없었다. 전부터 잠이 적었던 나는 잠 때문에 고민해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은유가 교문을 들어서며 물었다.

[오후에 시간 좀 있니?]

[왜에?]

[마치고 우리 집에 가. 아주머니 시골 내려가셨어. 실컷 차이코프스키와비발디를 듣지 않을래?]

[그러고 싶지만 안돼. 난 요즘 좀 그렇잖니]

우리는 곧 등교하는 무리들에 섞였다.등교길은 언제나 말의 홍수를 이룬다.말은 샘물과 같아서 끝없이 퍼내도 솟아나는 것일까. 왜 사람은 끝없이 말을해야만 할까.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말할 수 없기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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