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경북육상,특히 장거리부문의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역전경주였다.역전경주가 벌어지는 구간의 인근마을에서는 남녀노소 가릴것 없이 일손을놓고 구경나와 선수들을 응원했다.
주민들의 갈채속에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달리는 선수들을 지켜본 어린이와학생들이 육상에 호기심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이 때문에 경북 각지에서 선수들이 쏟아졌고 역전경주를 통해 무명선수들도발굴돼 장거리스타로 떠오를수 있었다.
1946년 대구~하양간 역전경주에는 지역 대부분의 중학교와 직장팀들이 참가, 시민들의 열띤 호응속에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때 우승팀은 구자옥 이태춘 등이 소속해있던 경북도청이었다.학교육상부가 일제치하에서 극일의 수단으로 일찍 발전해온데 비해 직장팀이생기기 시작한 것은 해방후부터.
시설이나 기구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육상은 직장단체에서도 가장 운영이손쉬운 종목이었다.
이에 따라 직장팀은 짧은 시간에 급격히 늘어나 경북도청 대구시청 남전(한전) 전매청 석탄조합 식량영단 대한방직 등 10여개에 이를정도로 붐을 이뤘다.
직장팀들은 시민운동회에도 참가해 대항전을 벌였고 이를 응원하는 여직원들의 모습은 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관중들의 또다른 구경거리가 됐다.대구-하양간 왕복에서 시작한 역전경주는 참가팀의 증가와 선수들의 실력상승으로 대구-영천간,대구-경주간 등 구간을 넓히며 발전을 거듭했다.박만태씨는 "전쟁의 와중에도 역전경주는 계속돼 54년부터는 봄가을로 구분, 경기가 치러졌습니다. 대구-경주간 역전경주가 봄에, 대구-영천간 경주는가을에 벌어졌지요. 변변한 계측기 하나 없어 대회준비에 몸살도 많이 앓았지만 그덕에 지역육상도 성장세를 유지할수 있었습니다"라고 당시를 기억했다.참가학교와 팀이 계속 증가하자 대회를 주관하던 경북육상연맹은 시군대항대구-안동간 역전경주를 신설하기도 했다.
경북지역 역전경주의 발전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전라도와 충청도등지에서도 역전경주가 속속 생겨났고 1955년에는 제1회 경부역전경주가 시작됐다.
경북팀이 경북역전경주에 참가한 것은 1956년 2회대회부터.이때 생긴 일이 육상계 최대의 오점으로 기록된 '갈퀴사건'이다.경북은 박만태와 이경철을 감독과 코치로 15명의 선수단이 출전했으나 대회결과는 최하위였다.
전국최강을 자랑하던 경북육상이 꼴찌에 추락한 것은 3군(군)의 치열한 경쟁결과였다.
경부역전경주는 시도대항뿐만 아니라 3군(군) 즉 특무대를 주축으로 한 육군과 해병대 공군의 대항전도 함께 진행됐다.
자존심을 건 3군의 경쟁은 지나칠 정도로 뜨거워 각지역의 우수선수들은 대부분 반강제로 군에 뽑혀갔다.
특히 특무대는 당시 엄팔용 이이재 오문섭 배희조 도록창 이용길 등 전국최고를 달리던 경북선수들로 구성, 경북팀을 방불케 했다.
이들을 앞세운 특무대는 1회대회에서 손쉽게 우승을 차지했다.이경철씨는 "일급선수를 모두 군에 뺏기고 중고교선수들로 겨우 팀을 구성한경북팀이 꼴찌를 하는 것은 당연했지요. 당시에는 군의 위세가 대단해 시도대항전은 3군대결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였습니다"라고 회고했다.그러나 3군에출전한 선수들도 각팀의 우승에 대한 과잉집착으로 제기량을발휘하기 어려웠고 마침내는 '갈퀴사건'이란 해괴한 일까지 발생했다.1회대회에서 특무대에 우승을 뺏긴 해병대는 지상욱과 정기선 등 영남고 유망주들까지 참가시켜 우승고지를 노렸다.
그결과 해병대는 김천까지 3일동안 선두를 유지했고 2연패를 목표로 하던특무대 선수단에는 비상이 걸렸다.
김천에 도착한 특무대 선수단은 고심끝에 갈퀴를 이용해 달리는 기발한 반칙을 구상해냈다.
다음날 구간은 추풍령을 넘어야 하는 경부간 최난코스.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에 이르자 선수들은 지치기 시작했고 주위가 뜸해지자 특무대팀은 '작전'을 개시했다.
전날 대장간에 급히 주문해 만든 갈퀴를 응원지프에 걸고 끈을 매 지친 선수의 허리에 묶어 지프를 몰았다.
지프의 힘으로 오르막을 오른 선수들의 기록은 빠를수밖에 없었고 특무대는마침내 선두에 올랐다.
기록에 이상함을 느낀각팀관계자들은 마지막날 천안-서울 구간에서 심판차를 보냈으나 응원트럭이 양쪽에서 방해, 사실확인에 실패했다.그러나 군포를 지날때쯤 특무대의 반칙은 마침내 발각되고 말았다.헬기까지 동원해 특무대팀을 감시하던 공군이 지프가 선수를 끌어주는 장면을보고 연도에 나와있던 응원단에 연락해 현장을 잡은 것.
한바탕 시비가 벌어졌지만 특무대는 이를 뚫고 끝까지달려 1위로 서울에골인했다.
시상식장에서 일대 소동이 일어 각팀의 이의제기가 쏟아지고 고함소리가 난무하는 등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러나 특무대는 막강한 영향력을 동원,"증거없다"는 판정을 끌어내 대회2연패를 달성했고 2위를 차지한 해병대팀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이로 인해 다음대회부터는 팀마다 경기내내 감찰이 붙는 등 엄격해졌지만 '갈퀴사건'은 육상계의 씻을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남아있다.〈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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