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는 증언한다 광복50년...전일본군 위안부 수기(8)

(1) 강제연행나는 1924년 봄, 대구시 달성동에서 태어나 대명동에서 자랐다. 형제자매는 내 위로 15세 많은 언니와 아홉살 차이의 오빠, 세살아래 남동생 등 모두네명이었다.

아버지는 몇년에 한번씩 집에 들르셨는데 내가 여덟살때 돌아와 시름시름앓으시다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돕다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고 하셨다. 집안살림은 어머니가 삯바느질이나 품팔이를 해서겨우 끼니를 이어갔다.

가난때문에 나는 학교근처에는아예 가보지를 못했다. 그러나 어렸을때부터 기억력이 매우 좋았고 배우고자 하는 욕심도 많아 집근처 서당에서 어깨너머로 천자문을 배웠고 야학에서 한글, 일본어 기초정도를 배워 까막눈 신세는 면했다.

내가 열세살때였다. 일본에 살던 먼 친척부부가 우리집에 와서 나를 일본에 데려가 잔심부름정도시키면서 학교도 보내주고 크면 시집도 보내주겠다고 제의했다. 공부시켜준다는 말에 어머니는 두말없이 승락하셨다.친척집은 규슈현 오무타에 있었는데 조선여자 여러명을 데리고 잠도 자고술도 파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친척은 내 댕기머리를단발로 싹둑 잘라버리고학교에 보내주기는커녕 어린 나에게 설거지, 빨래,청소 등 궂은 일을 도맡아시켰다. 속았다는 생각에 분한 마음이 들면서 몇년후면 내게도 술시중을 시키겠구나싶어 두려워졌다.

시모노세키행 배편을 알아본뒤그동안 가끔 손님들로부터 받은 팁과 시장볼때 잔돈푼 모아둔 것을 들고 몰래 그 집을 나왔다. 일본에 온지 8개월정도됐던 때였다.

대구의 집에 돌아온 뒤로는 일본사람이 경영하는 왕골슬리퍼공장에 다녔다. 그곳에선 월1회 싸래기를 배급받을 수 있었다. 공장일이 없을때는 가끔산하나 건너편 화장터의 하루코네 집에 놀러갔다. 하루코의 아버지는 시체태우는 일을 했는데 시체사르기전에 지내는 제사의 제물을 얻어먹는 재미가 솔솔했다.

내나이 16세때였다. 그해 늦가을쯤의 어느날 하루코네 집에서 놀다 해가뉘엿해졌을무렵 그 집을 나섰다. 얼마 걷지 않아서였다. 긴 칼을 차고 긴 장화를 신은 일본군복차림의 한 남자가 다가와 우악스레 내팔을 잡았다. 옆에는 조선인형사 한명도 함께 있었다. 일본군인이 "네집이 어디냐?"고 하길래"이 밑이다"했더니 "따라가자"고 했다.저녁지어야된다고 했더니 대뜸 뺨을때리고 발길질을 하며 "앞서"라고 명령했다. 순사라는 말만 들어도 무서워떨던 시절이라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끌려갔다.

그들은 나를 대구역앞의 한 건물로 끌고갔다. 거기엔 내또래의 여자애 한명이 먼저 와있었다. 우리는 저녁도 굶은채 긴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그대로 새우잠을 잤다. 우리앞에 닥쳐올 모진 운명은 생각지도 못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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