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헌은 요즘말로 하면 국제간 학문교류와 민간외교에도 선구적인 모범을보이고 일등국민논쟁으로 당시 지배적이었던 북벌론(북벌론)의 허상을 폭로했다.근대민족국가 시대가 시작되는 18세기의 세계조류는 국가간의 문호를 개방하고 무역을 통한 문물의 교류가 촉진되는 새 시대를 열고 있었다.그러나 조선의 집권층은 기존국가체제 유지를 위해 쇄국주의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이웃 중국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전시대보다 위축된 양상을 보였다.더욱이 중국과의 관계는 야만인 여진족의 청국이 들어선후 내면적인 적대관계가 계속, 일년에 몇차례 공식적인 사신의 행차가 있었을 뿐 민간의 문물교류는 꽉 막힌 상태였다.
이 때문에 중국과의 국경지역 책문(책문)에서는 밀무역이 크게 성행하는등 부작용이 빚어지고 있었으나 중세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힌 집권사대부들은이를 국가적 경영수익으로 활용할 생각도 않고 또 그렇게 할 능력도 없어 방관만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경색된 대외관계가 세계사적 조류에 역행할 뿐 아니라 부국강병에도움이 되지 않음을 직감한 담헌은 중국사행을 다녀오자마자 중국선비들과만나 나눈 이야기를 담은 '건정회우록'(건정회우록),여행중 보고 들은 중국문물을 소개한 '담헌연기'(담헌연기)를 써, 청국이 당시 조선이 믿고 있던야만인 청국이 아님을 알리는한편 중국선비들과의 학문교류를 적극화 함으로써 조선인의 시야를 넓히고자 했다.
담헌의 학술교류와 민간외교는 북경서 과거시험을 보러왔던 중국 절강성항주(항주)의 세 선비 엄성(엄성) 반정균(반정균) 육비(육비)를 극적으로 만남으로써 비롯됐다.
담헌과 함께 사신으로 왔던 이기성이 안경을 사기위해 북경 유리창(유리창)에 갔다가 사지못하고 서성거리고 있던중 마침 그곳에 있던 선비들에게끼고 있는 안경을 팔도록 조르자 그 중 한사람이 안경을 공짜로 벗어 주었다.
안경을 얻어 숙소에 돌아온 이기성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예의에 벗어나지 않을가를 담헌에게 상의하고, 다시 담헌과 함깨 인사차 이들 세선비를 찾은 것이 손자대까지 이어지는 국제간 세교(세교)의 우정을 남겼다.담헌이 죽을때까지 20년동안 편지를 통해 참학문 즉 실학(실학)이 무엇인가를 논하고 서적을 서로 주고 받으며 상대방 나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방향으로 전개됐는데 서로의 절실함이 당시 양국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친구사귀기의 귀감으로 부러움을 샀다.
북경서 중국선비들과 일곱번을 만나 밤이 지새도록 양국의 문화, 지리, 역사를 필담으로 나누고 돌아온 담헌은 곧바로 '해동시선'(해동시선)편찬에 몰두, 이듬해 조선의 시와 풍류를 알고 싶다고 한 반정균에게 보내는 한편 당시 중국한역서로 서학(서학)의 총서였던 '천학초함'(천학초함) 한질 52권을보내주기를 간청했다.
담헌이 부탁했던 '천학초함'을 요구한지 10년만에 반정균은 귀하와 같은동방의 군자가 너무 서양학문의 사설(사설)에 빠져 선비의 도를 잃을까 걱정된다는 편지와 함께 '동문산지'(동문산지) '천문략'(천문략)등 후반부 반질을 보내 왔다.
담헌은 또 엄성에게 이율곡의 '성학집요'(성학집요) 한질 4책을 보내며 이책을 중국에서 판각해 널리 유포시켜 줄 것을 부탁하고, 일종의 계측기인 규비와 비례척(비례척)을 구해 보내 줄 수 없는가고 물어 그의 서양과학기술에대한 끈질긴 집념을 나타냈다.
담헌은 이와 함께 반정균에게 보내는 답신에서는 중국의 저자 주린이 쓴 '명기집략'(명기집략)에 선조(선조)임금이 술에 빠져 임진왜란을 불러들였다든가 이순신(이순신)의 이름을 이순이라 하는등 남의 역사를 왜곡한 부분이10여곳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를 바로잡아줄 것을 요구, 2백년전에 이미 오늘날의 외국역사 교과서 바로잡기 운동의 선봉장이 됐다.
기일원론(기일원론)에 입각, 인물(인물) 귀천(귀천) 화이(화이)등 모든 이원론적인 차등 개념을 불식시켰던 담헌은 그의 철학이념과 마찬가지로 중국선비들과의 사귐에 있어서도 만인평등 사상을 지녔던 탓에 특히 그와 친밀했던 엄성은 죽을때 담헌이 보낸 먹과 편지를 꺼내 묵향을 맡으며 임종했다고한다.
엄성의 부음을 받고 담헌은 애사를 지어 보냈으며 엄성의 아들은 아버지의유집 '소청량실유고'를 보내 왔다.
또 담헌의 차손(차손)은 담헌 사후 60년이 지나 연경에 갔을 때 반정균의손자와 우정을 나누는 등 혈육지정 이상의 친교를 가졌다.
이같은 담헌의 불편부당한 국제학술교류와 친구사귐은 당시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존화양이(존화양이) 사상에 젖어 북벌론을 주장하던 재야의 선배학자 김종후(김종후)와 이른바 제일등국민(제일등국민)논쟁을 벌이게 된다.일등국민논쟁은 김종후가 오랑캐의 나라 청국에 간다는 것 자체가 선비가할 도리가 아닌데도 과거 시험을 보려는 변발의 청나라 선비와 형제처럼 친교를 나누는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하고 나선데서 시작됐는데 김종후는 두번의 편지글에서 그같은 일은 조선선비의 명분을 그르친 일이아닐 수 없다고 흥분했다.
그러나 담헌은 오랑캐에게도 배울 것이 있으면배워야 한다고 했던 그의철학적 신념에 따라 비록 중국의 선비들이 한족(한족)이면서 머리를 깎고 청국옷을 입는 것이 불행이긴 하지만 그들중에는 실속없는 명분론에 얽매여 있는 조선선비들보다 훌륭한 사람이 많다고 꿋꿋하게 맞서 당시 젊은 선비들의찬탄을 받았다.
담헌의 한시대를 앞선 사상과 지식은 당시 지식인들의 인정을 받아 44세에음보(음보)로 세자 정조(정조)를 가르치는 익위사시직(익위사시직)으로 천거, 벼슬길에 나선후 실학에 관심이 컸던 정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감찰, 태인현감, 영천군수로 승진됐다. 52세때 어머니의 병환을 이유로 고향으로 낙향했으나 얼마안돼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하직했다.
담헌의 유족으로는 종손 홍두화씨(45)가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 살고 있으며 방계손 홍승혁씨(65)가 담헌의 묘소를 돌보며 이웃집 창고로 쓰이고 있는담헌 생가집의 문화재지정을 서두르고 있다.
담헌은 자신의 정치적경륜을 담은 저서 '임하경륜'(임하경륜)에서 8세이상의 어린이는 한데 모아 학문과 함께 활쏘기, 말타기, 글씨쓰기, 셈하기,기예등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 오늘날의 의무교육실천을 미리 논하는가 하면 이주와 여행의 자유를 거론하는등 제도개혁에서도 그의 한시대를 앞선 생각이나 사상 못잖게 독창성을 보이고 있는데 최근 일본 실학연구회장 오가와하루히사(소천청구)도쿄대학교수는 17~18세기 한·중·일 실학을 비교검토한'한국실학과 일본'이란 저술을 통해 담헌 홍대용의 사상이 근세적 실학에 가장 가깝게 도달했다고 평가하고 이를 현대사회에서 계승해야한다고 말해 관심을 모은다. 〈최종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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