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KGB와 나(3) 전부의장 보브코프회고록--냉정(Cold War)

'냉전' (Cold War).동-서의 긴장상태를 나타내는데 이만큼 적합한 용어가 있을까. 실제 포탄이 작렬하는 전장보다 만면의 웃음뒤에 숨어 있는 음모가 더욱 전율스런 것이다. '차가운 전쟁' 콜드 워는 그래서 금세기 가장 많이 언급된 용어중 하나가 됐다.

이 말을 처음사용한 사람은 국제원자력위원회의 미국 대표인 B·버루크.미국의 유명한 정치평론가 W·리프만이 그의 논문 제목으로 사용하면서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게 됐다.

'냉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진영의 일촉즉발의 정치, 외교, 이념적갈등, 군사적 위협등 잠재적 투쟁을 말한다.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상대의허점만을 노리는 사자의 공격전 자세와 흡사하다.

'냉전'의 원인은 2차대전의 전후처리에서 비롯됐다. 서로 손을 잡고 독일과 일본을 패퇴시킨 미국과 소련, 영국은 그들 자신의 구상대로 세계를 재편하려고 했다. 이념을 달리하기에 쉽사리 타협될 수 없었고 이러한 가운데 갈등은 증폭되어갔다. 냉전의 실질적인 도화선은 윈스턴 처칠 영국총리. 그는"발트해로부터 아드리아해에 이르기까지 유럽을 둘러싼 철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있다"는 반공연설로 공식적인 '냉전'의 선전포고를 내렸다. 그리고 그해 트루먼 미대통령이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미국이 공산세력 저지의 지도적역할을 해야한다"는 이른바 트루만 독트린을 선언함으로 본격적인 '냉전'에돌입한다. 그후 아이젠하워, 존 F·케네디, 스탈린, 흐루시초프등 '맹장'들에 의해 '냉전'은 근 40년간 동서진영의 절대명제로 자리잡게 됐다.47년 10월 소련공산당을 중심으로 코민포름이 결성되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전단계라 할 서구동맹(WEU)이 48년 발족하면서 동서대립은 격화되어 갔다. 48년 소련의 베를린 봉쇄인 '베를린 위기', 49년 4월 나토 창설,한국전쟁, 중동전등 '국지전'이 일어나면서 표면적으로는 소련이 다소 밀리는 추세를 보였다.

그러나 소련이 수소폭탄 개발(53년), 대륙간 탄도탄 발사(57년), 인공위성개발(57년)을 성공시키면서 양대진영은 군사적 힘의 균형을 이뤘고 대결은한계점에 이르러 평화공존 무드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특히 쿠바의 핵전쟁 위기를 넘긴 양진영은 평화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하게느끼게 된다. 61년 KK회담(케네디-흐루시초프 회담)이 열리고 중립세력인 아프리카 신생국과 아시아국가들의 AA그룹 형성, 70년대 경제대국 일본의 등장으로 '냉전'은 이데올로기보다 국익을 우선하는 국제사회로 바뀌어갔다. 이른바 다극화체제를 바탕으로 한 평화공존과 긴장완화의 '데탕트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김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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