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족의 성산 백두산-지명

연변 지명의 유래부르기 쉽고 외우기 쉬운, 아름다운 이름을 으뜸으로 치면서도 이름을 지어줄때면 누구나 고심을 거듭한다. 가능하면 좋고 고상하면서도 작명법에도 어긋나지 않는 이름을 지어줘 잘 살기를 바라는 염원이 실려진다. 땅 이름도 그렇다. 땅의 모양이나 주변 환경을 본따 짓는이름도 있고 동서남북 방위를 따진 이름, 동물과 식물의 이름을 가져와 지은 것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상당수 지명에는 처음 마을을 이룬 사람들의 염원이 실려져 있다.

선인들의 감정과 풍습까지도 그대로 담겨진 지명의 유래는 한말부터 우리민족의 이주가 이어진만주, 즉 연변일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동서남북이나 전후좌우등 위치로 표시된 이름에서부터숫자로 지어진 이름, 산이나 골짜기의 형태에 따라 지은 이름까지 다양하다. 우리민족의 이주이후만주에 쌀농사가 시작되면서 물이 어디에 어떻게 있느냐를 따져 지은 이름과 동식물은 물론 광석등과 관련된 이름도 적지않다.

先人들 풍습 그대로

그러나 만주에의 봉금조치가 풀리고 이주민들이 만주지역을 자자손손 살아야할 제2의 고향으로여기면서 조선족마을의 지명 형태는 조금씩 바뀌게 된다. 마을을 새로 만들면서 초기 이주자들은그 땅에 그들의 염원을 담았다. 현세는 물론 후손들의 태평과 안녕, 화목을 기원해서 지은 이름에서부터 풍년과 장수의 바람을 담은 지명이 늘어간다. 또 최초 이주자의 성씨와 이름으로 지은 지명도 생겨나고 떠나온 고향마을 이름을 그대로 옮겨놓은 지명도 등장한다.

연변지역 지명을 연구, '중국조선족 취락지명과 인구분포'라는 저서를 펴낸 연변대학 지리학부 심혜숙교수는 "지명은 명명시기의 문화와 역사적 배경을 반영해 주고있다"고 한다. 심교수는 조선땅에 거처를 둔채 변경의 감시망을 뚫고 두만.압록강을 건너 몰래 들어와 씨를 뿌리고 거두어가던조선사람들이 연변지역에 아예 마을을 세우고 농사짓기 시작한것은 함풍초기(1851~1856년)라고한다.

만주지역 천여리 땅을 '거룩한 곳'이라하여 이민족의 이주를 금지한 청나라의 봉금령이 아직 해제되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은 조선농민들은 해란강 유역에 자리잡고 금곡촌,후동, 석문촌등을 세웠다. 이후 조선땅에 재해가 심해질때마다 고향을 버리고 두만강과 압록강을건너오는 조선인은 늘어나 작은벌, 큰벌등 조선족마을이 하나둘 늘어갔다. 이후 봉금령이 해제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주해온 조선사람들은 그전의 이주자들이 숨어살기좋은 골짜기에 마을을 세우던것과는 달리 드넓은 들판을 차지하게 된다.

조선지명 4곳달해

심교수는 지명연구를 통해 이런 결론을 내린다. '초기 이주이후 조선에 큰 재해가 닥치면서 다섯차례의 대규모 이주시기가 있었다. 그결과 연변지역 5천여지명중 조선어지명이 1천여개에 이르게됐다. 이주초기 조선족마을의 지명은 지형을 본뜬것이 위주였으나 차츰 눌러살게되면서 이주민의염원을 담은 지명의 비중이 높아졌다. 또 조선족 이주전에는 버려진 땅들에 미작이 시작되면서물과 관련된 지명도 늘어났다'

연변에서 가장 일찍 선 조선마을중의 하나인 금곡촌은 땅은 척박하지만 이주민들이 숨어지내기안성맞춤인 골짜기로 이주초기 몇가구에 불과했으나 마을입구에서 나오는 사금을 캐려는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금곡촌으로 이름지어졌다. 또 개간초기 범이 많아 호환이 끊이지않았던 향천향의'백룡'마을은 범과 싸워 이기는 짐승인 백룡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뱀이 많아 '뱀골'로 불리어진'화룡'은 이름의 어감이 좋지않다하여 바꾼 케이스. 뱀이 용이 되어 승천한다는 전설을 따라 화룡으로 고쳤다.

화룡의 한촌마을(한가촌), 오촌마을(오가촌), 안가동(안가동)은 초기 이주자들의 성씨를 따서 지은지명이다. 전라도 무주에서 이주해 왔다해서 무주툰, 함경도 나남에서 온 개간민들이 세운 '라남'은 이주자들이 한고장 사람들이지만 여러고장 사람들이 함께 이주해와 몇가지 지명을 본따 지은이름도 있다. 함경도 길주와 성진에서 같이 와 새마을을 세운 개간민들은 각각 고향마을에서 한자씩 따서 '길성'으로 지었다.

용정시의 '자미하촌'은 화기애애하고 재미있게 살자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며 시만촌(詩滿村),걸만촌(傑滿村)이라는 이름도 있다. 시가 넘치고 걸출한 인물이 쏟아지는 마을이 되라는 염원이담겨있다. 학교를 세워 가난한 농민의 자녀들도 글을 배울수있게 되었다는것을 기념하여 '문화마을'이라고 지은 조선족마을도 있다.

후손태평.풍년 기원

회령촌, 고려촌이 수십개도 넘을만치 고향마을을 본따지은 지명을 살펴보면 압록강과 두만강과가까울수록 함경도, 평안도 이주민들이 많고 대신 경상도 전라도 이주민들은 내륙 깊숙히 자리잡은것을 알수있다. 변경지역의 함경도 사람들이 일찍부터 만주로 넘어간것과 달리 경상.전라의 이주민들은 일제의 압박과 기아를 견디지못해 뒤늦게 넘어간탓이다.

만주지역이 '간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것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만주를 침략한 일제가관동사무소를 세웠다는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두만.압록강을 비롯한 만주의 여러 강 사이의땅이라는 데서 생겼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상당수 역사학자들은 버려진 만주땅에 조선사람들이 들어와 쌀농사를 하면서부터 '개간민이 사는 땅'이라하여 간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다음은 연길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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