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초대석-박상하 대한체육회 부회장

박상하(朴相何)대한체육회부회장 겸 경북체육회상임부회장이 2001하계U대회 대구유치를 처음 제안한 것은 지난 92년 광주전국체전에서였다. 당시 전주.무주는 97동계U대회를 유치하려고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대구U대회가 대구.경북지역이 세계속으로 뻗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박부회장의 앞날을 내다본 견해는 지역사회의 무관심으로 그 추진력을 얻는데 실패했다.그후 3년뒤 포항전국체전. 모든 상황이 변했다.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가 열렸지만 지역은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지역민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도전'이필요했다. 문희갑대구시장도 박부회장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2001하계U대회 대구유치운동은 이렇게 첫발을 내디뎠다.

현재 대한체육회부회장으로서, 또 국제정구연맹회장으로서 세계스포츠계의 중심인물로 활약하고있는 박부회장은 77년 고향인 경북 달성군 구지면(95년 대구편입)체육회 후원회장으로 체육계에입문했다.

대학졸업후 시도한 광산업에 실패하고 어려움을 겪다가 동생 상원(相元.48.미주산업 사장)및 상희(相熙.45.미주그룹회장.중소기업중앙회장)씨와 힘을 합쳐 시작한 새 사업이 자리를 잡고부터다.74년 박부회장이 사장, 상원씨가 감사, 상희씨가 상무를 맡는 등 3형제가 서울영등포 문래동에서문을 연 대진철강과 미주실업은 그동안 착실한 성장을 거듭, 지금은 1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린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

박부회장은 46년 경북달성군 구지면 창리(95년 대구편입)에서 아버지 박명수(朴命洙.77)옹과 어머니 정정이(鄭貞伊.작고)씨의 3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하지만 부지런했던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로 자라난 박부회장은 어릴적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청소년시절 만능 선수

구지초등학교와 구지중학에 다니면서 육상, 씨름, 배구등 만능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박부회장이 배구부에서 활약할 당시 구지중은 경북지역대회 9연패를 이루며 전국체전에 출전하는 등 최강을 자랑했다(당시에는 소년체전이 생기기 이전이어서 중학생도 전국체전에 참가했었다)."솔직히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운동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사실상어려웠고 장남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가 컸기 때문에 꿈을 포기할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面 후원회장으로 입문

박부회장이 면체육회 후원회장으로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고 그후 스포츠 발전을 위해 정력적으로활동할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마도 '어릴적 못다 이룬 꿈' 일지도 모른다.

박부회장의 체육계 경력은 화려하다. 79년 달성군체육회 상임부회장, 80년 경북하키협회장(경북체육회이사 피선), 81년 경북체육회부회장, 86년 대한하키협회부회장, 91년 한국대학하키연맹회장(대한체육회이사 피선), 92년 대한하키협회장을 거쳐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홍보위원장 및 93년 한국올림픽위원회(KOC) 국제위원장으로 국제스포츠 무대에 본격적으로 데뷔했다.박부회장은 또 대한정구협회장, 대한체육회부회장, 히로시마아시안게임 단장, 국제정구연맹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94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물론 박부회장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구지중 재학때 최상위권의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지만 갑작스런 입시제도의 변경(주관식에서 객관식으로)을 극복하지 못하고 경북고 입학에 실패했다. 또 대학입시에서는 문과에서 이과로 바꿔 서울대 공대 진학을 시도했지만 역시 좌절됐다(영남고를 졸업한 박부회장은 청구대에 입학했지만 군입대와 함께 중퇴하고 후에 건국대에 편입해 학업을 마쳤다)

정치포기 장학회설립

73년 처음 시작한 광산사업이 파산했을때는 부인 김세순(金世順.48)씨가 경상여상과 경북여상에서교편을 잡으며 생계를 이어갔다.

사업과 체육계 활동을 겸해오던 박부회장이 사업을 완전히 동생들에게 넘겨준 것은 정계입문을결심한 87년. 당시에는 야당 또는 무소속 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회사에 미칠 피해를 우려해서였다.

92년 여당인사의 추천으로 공천을 신청했지만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따라 탈락하는 비운을 맛봤다. 당선확률이 높다며 야당 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라는 권유가 잇따랐지만 모두 거절했다."사람은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삶의 철학으로 삼아왔습니다. 공천을 신청해 탈락했다고 다른 당이나 무소속으로 출마한다는 것은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정치를 포기한 이유입니다"

박부회장은 선거자금으로 모아두었던 돈을 기금으로 '금맥장학회'를 설립했다. 이에따라 70년말부터 달성군 지역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지급해 오던 장학금을 대구.경북 전지역으로 확대할수 있었다. 현재 10억여원의 기금을 확보한 금맥장학회는 미주그룹의 지원을 보태 향토 인재들과 지역학술사업에 매년 1억여원을 사용하고 있다.

세계에 정구 보급 주력

"정치를 통해 지역과 국가에 기여할수도 있지만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들을 돕는 일 역시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정치에는 아무런 미련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 향토인재들을 키우고 영원한 스포츠맨으로 남는게 앞으로의 인생계획입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IOC위원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박부회장은 지금 회장직을 맡고 있는 국제정구연맹의 가입국이 아직 50개국에 불과하기 때문에정구를 전세계적으로 확대, 보급하는데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물론 97년 전주.무주동계U대회와 부산동아시아게임, 98강원동계아시안게임, 2001부산아시안게임,2002월드컵 등 우리나라에서 개최될 각종 국제스포츠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이바지 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무한 경쟁시대 대비를

특히 대구.경북지역에서 유치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2001년 하계U대회의 성공적 유치와 개최는 박부회장이 가장 노력하는 부분이다.

"지금은 21세기 무한경쟁시대를 대비하는 중요한 준비기간 입니다. 대구.경북이 보수적 성격을 탈피하고 보다 진취적인 기상을 가질때만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습니다. 각 분야의 인사들은 현재보다 다음 세대를 위해 뭔가를 이뤄놓아야 합니다"

박부회장은 '인재를 키울줄 알고 아낄줄 알아야 희망찬 역사를 창조할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