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춘진롄(三寸金蓮)'. '세촌길이의 연꽃'이라는 뜻으로 전족한 여자의 작은 발을 미화시킨말이다.
요즘은 자주 볼 수 없지만 예전엔 한국에서도 한뼘길이만한 작은 신을 신고 아기작거리며걷는 화교할머니들을 더러 볼 수 있었다.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는 눈에 많이 뜨이지 않았지만 '낙양의 지가(紙價)'라는 말로 유명한 고도 루오양(洛陽)이나 쿵즈(孔子)의 고향 취푸(曲阜)같은 고풍스런 지방에선 아직도 거리 곳곳에서 전족(纏足)한 할머니들을 볼 수 있다. 대개 70대이상의 고령층으로 짧은 단발머리에 칙칙한 검정 또는 빛바랜 푸른 바지차림으로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들이다.
납작한 검정 헝겊신속의 발은 내손보다 작은 듯했고 발등은 소복이 솟아올라 굽어진 채 변형돼 보는 이로 하여금 안쓰럽게 했다. 중국노인들이 대중적으로 즐기는 춤인 양거얼도 출수 없고 태극권같은 느릿한 운동도 할 수 없다. 바람만 좀 세게 불어도 몸의 균형을 잃고넘어지기 일쑤이니 장애인과 다를 바가 없다.
중국인만큼 여자의 작은 발을 흠탄의 대상으로 삼는 민족도 없는것 같다. 고대 중국문학에나타난 미인상은 하얀 피부·오이씨 같은 얼굴·버들눈썹·은행알같은 눈·앵두같은 작은입·죽순같은 손·검은 머리카락 등이었으며, 풍만함이 미의 기준이었던 탕(唐)대를 거쳐 쑹(宋)대에 접어들면서는 작은 발이 아름다움의 중요한 기준이 됐다. 궁중과 상류층에서 시작된 전족은 곧 가문의 지체와 부를 상징하게끔 됐고, 점차 하층민으로 확산되면서 여자들은맹목적으로 작은 발에 집착했다.
이유는 단 한가지, 남자들이 발 작은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중매쟁이들은 신부감이예쁘냐고 묻지않고 발이 얼마나 작은 가를 물었다. 아무리 용모가 양귀비 뺨치게 예뻐도 발이 크면 추녀였고 결코 좋은 가문에 시집갈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중국의 딸들은 아장아장 걸을 나이인 세살무렵부터 발을 묶었다. 엄지에서 셋째발가락까지는 그냥 두되 넷째와 다섯째발가락을 발바닥쪽으로 꺾은 뒤 긴 무명천으로 사정없이 꽁꽁 묶었다. 마치 철사로 나무를 비틀어매 분재로 만들듯 여린 뼈의 성장을억지로 막아 '조막발'로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아이가 울며 보채도 '딸의 장래를 위해'결코 발싸개를 풀어주지 않았다. 여자들은 평생 발이 묶인 채 살았으며 오직 죽음만이 그들을 발싸개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흔히들 '중국에선 여자 수가 모자라 도망을 못가도록 전족을 하게 했다'고들 하지만 실제로중국남자들이 그토록 전족에 집착한 것은 바로 에로티시즘때문이었다. 전족의 발소리를 듣거나, 발싸개천을 풀어 발에 코를 바싹 붙이고 냄새를 들이키기도 하고, 발바닥의 옴폭 팬곳에 건포도같은 것을 넣고 혀로 꺼내 먹는 등 전족에 관한 별의별 괴상망칙한 관능적인 방법이 48가지나 된다고 한다.
중국 여성억압의 대표적 상징물인 전족풍습은 1898년의 정치개혁운동인 무술유신(戊戌維新)이후 점차 사라져 1949년 신중국 건국이후 법으로 이를 금지, 비로소 중국여성들은 오랜 고통과 굴욕의 굴레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매주 토·일요일 열리는 베이징의 싱치텐(星期天)시장. 해묵은 가구와싸구려그림, 때묻은 생활집기까지 온갖 잡동사니들이 나와 있는데 그곳에서 더러더러 전족신발들을 보게된다. 꼬질꼬질 때묻은 검정무명신도 있고 대갓집 아씨가 신었는지 고운 비단천에 화려하게 수놓인 꽃신도 눈에 띈다. 그옛날 누군가의 고통과 눈물이 배어있을 전족신발들이 이제는 상품으로 변신해 저잣거리에 나와있는 모습은 외국인 나그네에게도 왠지모를가슴 찡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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