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뒤주속에서 죽은 사도세자 과연 영조의 짓이었을까

윤 5월 19일, 즉 지난 양력 12일은 초복이었다. 사도세자는 1762년(영조 38년) 복날이 낀 뜨거운 여름날에 무려 8일간을 뒤주 속에 갇혀 절망과 분노, 갈증,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떨다세상을 뜬다. 과연 그 여드레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무리 사이코에 가까운 영조라 하더라도 과연 아들을 뒤주에 넣어 죽일만큼 이상성격자였을까.

당시 상황을 추리소설적 기법으로 그린 '사도세자의 고백'(푸른역사 펴냄)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을 깬다. '정신병자인 사도세자와 정신병자에 가까운 영조의 성격이 부딪친 결과가 뒤주의 비극'이란 것이 기존의 고정관념. 그러나 저자인 소장사학자 이덕일씨는 "이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대한 이성적 사료비판없이 이뤄진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한중록'을 감성적인 '남편의 비극을 곁에서 지켜본 아내의 한맺힌 기록'으로 받아들인데 있다는 것이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사람은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이며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쓴 이유도 멸문지화를 당한 친정을 변명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 이씨의 결론이다.그렇다면 홍봉한은 왜 사도세자를 제거했을까. 세자는 소론의 영수 조재호와 결탁해 군사력을 모았다. 이는 군사정변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영조가 사망했을때에 대비한 자구책. 그러나 노론에 속한 홍봉한은 이를 정변을 꾀하는 것으로 꾸며 영조에게 고변한 뒤 뒤주로 세자를 죽이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것.

그동안 이 사건은 '조선왕실 최대의 비극'으로 무수히 드라마화됐다. 그러나 대부분 '한중록'에만 의지해 영조와 사도세자의 모습을 왜곡되게 묘사하고 있다고 이씨는 지적하고 있다.이씨는 "현재 방송되고 있는 '대왕의 길'도 정확한 사료 해석에 실패, 뚜렷한 한계를 보이고있다"고 주장했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쓴 것은 사도세자가 처참한 생을 마친 이십대때가 아니라 칠십대인 순조 5년(1815년) 이후. 그는 이십대의 청상과부로서가 아니라 칠십대의 노회한 정객으로 '한중록'을 쓴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정조는 즉위 당일 대신들을 소견한 자리에서 14년동안 가슴에 묻어둔 말을 뱉는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한마디는 생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영조와 노론을 한축으로 하고, 사도세자와 정조 자신을 한 축으로 대립됐던 정쟁이 한 획을 긋게 됐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 무려 13년 이상이나 대리청정하던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였던 당시의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에 대한 혁명 선언이기도 했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조선왕실 5백년의 최대 비극의 탐색 지평을 '정신병과 이상성격'이란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이 아닌,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한 조선 후기 정치체제의 문제점이란 구조적인 차원에서 접근, 역사를 읽는 눈을 넓혀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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