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베리아 누빈 전설적인 항일영웅

시베리아의 항일영웅으로 한때 '진짜 김일성'으로 알려졌던 민족운동가 김경천(金擎天) 본명 김광서(金光瑞)선생.

백마를 타고 시베리아 벌판을 누비면서 일본군과 러시아 백군(白軍) 마적떼를 상대로 신화와도 같은 독립운동을 펼쳤던 김선생은 지금까지 사료 부족과 유족들의 소재파악이 안돼 '전설속의 장군' 또는 '수수께끼 인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김선생의 막내딸 지희씨(70)와 막내아들 기범씨(67)가 각각 러시아의 노브그로드와카자흐스탄의 카라간다에 각각 거주한다는 사실이 극적으로 확인돼 이번에 정부 초청으로일시 귀국키로 함으로써 그동안 베일에 싸였던 김선생의 치열했던 삶의 궤적이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나게 됐다.

증조부, 부친, 숙부 모두가 병조판서를 지낸 무인출신인 김경천은 1909년 1백대1의 경쟁을뚫고 일본 육사에 입학, 기병과에서 기량을 닦았다.

1911년 육사를 졸업한 김경천은 도쿄 제1사단 기병 제1연대에 근무하던중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2·8 독립선언으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지병을 핑계로 귀국한 그는 육사 3년 후배인 이청천(광복군 총사령관)등과 함께나라를 잃은 슬픔으로 통분하던 끝에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1919년 만주로 망명한 김경천과 이청천은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생활을 하며 독립군 양성의 기회를 엿보았다.

당시 이 학교에는 구한국군관학교 출신인 신팔균도 있었는데 이 세 사람은 조국독립을 위해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그 맹세의 뜻으로 다같이 천자가 붙은 별호를 갖게 됐다.즉, 동천 신팔균(東天 申八均), 경천 김광서(擎天 金光瑞), 청천 지석규(靑天 池錫奎)라고 했으며 이들은 이때부터 '남만3천(南滿三天)'이라고 불리었다.

김경천이 러시아로 이동한 뒤인 1920년 3월 한국과 러시아 적군 연합부대가 니콜라예프스크항에 주둔하던 일본군과 러시아 백군 수천명을 섬멸한 일명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군이 러시아 백군을 앞세워 대대적인 보복에 나서면서 한인들을 무참히 학살하자 조국독립을 향한 그의 투지는 더욱더 굳어져 갔다.

이때부터 일군 및 러시아 마적떼와 본격적으로 맞붙어오던 그는 보다 더 체계적인 독립군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 1921년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일명 창해소년단)을 구성해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활동범위를 남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으로까지 넓혀 '일군토벌'에 나섰다.수청 고려의병대와 고려혁명군 등에서 활약한 것도 이 시기를 전후한 일이다.

결국 러시아 백군 마적떼는 1922년 3월 김경천 부대에 패퇴했고, 이어 같은해 10월에는 그가 이끌던 고려혁명군 동부지역군에 시달리던 일본군 역시 시베리아 지역에서 철수하기에이르렀다.

특히 기병과 출신인 그가 만주망명 이후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수때까지 흰 말을타고 기병부대를 지휘하면서 만주에서 시베리아의 설원을 누비는 모습 때문에 당시 그를 뒤따르거나 이를 전해들은 한인들 사이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 인식되기도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그때까지 독립군측과 동맹세력을 형성했던 러시아적군은 한인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김경천은 스탈린에 의한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앞두고 1936년 9월 체포돼 원동지방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소련형법에 따라 3년형을 선고받고 일단 풀려난 뒤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그는 카자흐스탄의 카라간다주 텔만스키구역 집단농장에서 채소작업원으로 일하다 1939년 4월 '인민의 적'이라는 혐의로 다시 체포돼 같은해 12월 강제노동수용소에 8년 금고형 선고를 받고 1942년 소련 북동쪽의 한 유배지에서 심장질환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김경천의 '인민의 적 사건'은 스탈린 사후인 1959년 모스크바 군관구 군법회의에서 재심리됐으며, 이를 계기로 그는 사후 17년만에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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