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파노라마 20세기 문화(17)-음악의 혁명가 쉰베르크

체코 브라티슬라바태생 유태인의 아들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아놀드 쇤베르크(1874~1951)가 서양음악사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은 특이하다.

위대한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그의 작품은 그다지 비중있게 연주되지 않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쇤베르크는 르네상스이래 서양음악을 지배해오던 '장조' '단조'의체계와 결별하고 '무조 12음기법(음렬작법)'이라는 새로운 작곡법을 제창한 최초의 작곡가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20세기들어 칸딘스키가 회화에 추상의 개념을 처음 도입한 것과 쇤베르크가 무조음악을 실험한것은 같은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 쇤베르크와 칸딘스키는 밀도높은 내용의 편지를 교환했다. 또칸딘스키는 쇤베르크에게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에서 교편을 잡도록 초청했지만 쇤베르크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쇤베르크가 정식 음악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소년시절 바이올린 교습을받은게 전부다. 그 대신 친구들과의 실내합주활동, 토론등을 통해 자신의 음악의 길을 찾아나갔다. 그는 12음기법이라는 혁신적인 작곡법으로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등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많은 선구자들이 그렇듯 혁신적 작곡기법으로 20세기 음악의 새 장을 연 쇤베르크의 음악역정도 순탄치는 못했다.

1899년에 발표한 그의 대표작인 현악6중주곡 '정야(淨夜) 작품 제4번'은 정통적인 화음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엔나연주회때 연주를 거부당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01년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긴그는 술집용 가곡이나 오페레타 오케스트레이션을 쓰는데 시간을 보냈다. 2년뒤 다시 빈으로 돌아온 그는 베르크, 베베른을 제자로 받아들여 개인교습을 시작한다. 이들은 소위 '비엔나악파'로불려지는 '음악혁명'의 일원이 된다.

전혀 새롭고 깊은 경험의 영역에 도전한 이들에게는 난관이 많았다. 분명한 화성의 움직임과 주제 전개가 없는 이들의 무조음악에 대해 당시 청중들은 자신의 귀를 적응시키는 일이 굉장히 어려웠다. 1912년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5개의 소품'이 런던에서 초연됐을 때 청중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비웃기까지했다. 또 이듬해 쇤베르크의 지휘로 빈에서 열린 그의 제자들의 연주회는 일대 난장판이 되기도 했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쇤베르크는 변모를 시도했다. 바로크나 고전파 음악의 형식이나 수법을 다시도입하게된 1920년부터 23년에 걸친 작품들속에서 12음기법을 의식적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의 스트라빈스키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신고전주의를 받아들인 셈이다. 이같은 노력탓에1923년 처음 열린 국제현대음악제를 계기로 비엔나악파의 작품은 해마다 프로그램에 눈부시게 등장했다.

1925년 쇤베르크는 베를린 프로이센예술아카데미의 작곡주임교수로 임명됐다. 같은 해 베를린에서 초연된 제자 베르크의 오페라 '보첵'이 호평을 받으면서 비엔나악파에 대한 평판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들의 작곡세계가 공적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이같은 평탄한 삶도 불과 몇년. '유태적 요소는 프로이센예술아카데미에서 배제돼야한다'는 나치정부의 포고에 따라 1933년 베를린을 떠난 쇤베르크는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게된다. 나치지배하의 유럽에서 그와 비엔나악파의 음악은 금지당했다. 베르크(35년)와 베베른(45년)의잇딴 죽음을 지켜본 쇤베르크는 다시 유럽땅을 밟지 못하고 51년 숨을 거뒀다. 비록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가 그를 반동주의자로 몰아붙였지만 쇤베르크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과거의 가치에 대해 존경했고 한편으로 앞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을 계속한 작곡가임에 틀림없다.

〈徐琮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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