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직일기

실직이 사람의 마음을 이처럼 황량하게 만들 줄 미처 몰랐다. 예전에야 자신에게 적합한 일을 찾아 본인이 회사를 골라 떠나기도 했지만 지금은 무슨 일이든 하고 싶어도 일거리가 없다. 남편의실직과 동시에 내가 다니던 회사도 부도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뭐라도 할 일이 없을까 싶어 생활정보지를 신문 보듯 꼼꼼히 훑어보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식당일이라도 할까 했더니 나이가 너무 많단다. 구석진 곳에 난 중소기업의 생산직도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취업이 불가능했다. 정부에서 하는 취로사업이며 공공근로사업은 집이 있고 남편이있어 순위제외란다.

아무 할 일도 없고 할 능력도 없는 무능한 부모가 된 것 같아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아이들 눈엔 아빠가 정직하고 엄마가 오늘날까지 성실하게 살아왔다는사실이 과연 자랑스럽게 보일지 두려움마저 든다.

하루는 시장길에 동행한 막내아들이 이렇게 말했다. "엄마 여기봐요. IMF인데도 손님이 이렇게많네" 아들의 시선은 솔방울만한 아이스크림 한개에 1천7백원, 이름도 어려운 무슨 햄버거 한개가 2천6백원이라는 메뉴판에 가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군침만 삼키는 막내아들을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1만원권 지폐 하나를 들고 시장에 나와 고등어를 고르며 몇번을 뒤적거리고, 마음먹고 과일을 사려다 한바구니 4천원이란 말에 도망치듯 뒤돌아나온 터였다. 같은 또래 아이의 입에 아이스크림이 물리고 양손 가득 피자며 찬거리며 사들고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는 주부와 못난 엄마가 비교될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그러나 그날 저녁상을 물리고 아들이 남긴 메모 한 장을 보고는 내심 스스로를 못나게 여겼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부업으로 밤을 까는데 밤소쿠리에 묻혀있던 종이 한 장.

"엄마, 저녁 맛있게 먹었습니다. 제가 크면 아이스크림과 피자 많이 사드릴께요. 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형이 그러는데 결식아동이 10만명을 넘었대요. 거기에 비하면 우린 정말 행복하잖아요. 천천히 쉬어가며 밤 까세요"

나의 처지를 알고 나보다 못한 이에 대한 배려를 배우는 것이 진정한 참교육이 아닐까. 이 힘든시기가 아이들에게 어려움도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스스로 위로해 본다.정영희씨(주부·대구시 달서구 본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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