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어두운 징후들이 세기말적인 기류와 겹치면서 불안감의 골을 깊게 만드는 느낌이다. 더구나 그 끝이 안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우리는 지난 이태 동안 경제적 파탄의 쓰디쓴 아픔을 경험했다. 아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정부는 그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을 시도했지만 아직은 우리가 바라는 방향의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사회 무원칙의 극치
이같은 소용돌이 속에서도 정계는 여전히 정쟁을 일삼고 있다. 재계도 사리사욕 추구를 지양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지역주의와 이권주의도 개선은 커녕 날이 갈수록 덧나는가 하면, 도덕 불감증에다 원칙과 정도(正道)가 없는 집단이기주의와 편법들이 난무해 '밝은 전망'은 '강 건너 불빛'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각종 이권에 개입해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마저 부끄러움은 고사하고 '왜 나만이냐'고 항변하는 세태다. 또한 고질적인 안전불감증은 각종 대형 사고를 잇따라 부르면서 충격과 깊은 상처를 안겨 주었다. 이번에 불거진 '언론대책 문건' 사건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꼬여 있는가를 말해준다. '집단 히스테리 현상'이라는 진단도 있었지만 무원칙과 편법의 극치를 드러낸 경우에 다름아니다. 그저께 인천의 호프집에서 고교생들이 떼죽음을 당한 화재 사고도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어른들의 부도덕성과 안전불감증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는 생각을 하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우리 사회의 아노미(규범해체) 현상이 이토록 심각한 지경에 닿고 있음은 분명 큰 문제다.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기억들이지만 열차 탈선, 비행기 추락, 선박 침몰, 땅 속의 가스 폭발 등 대형 참사는 하늘과 땅과 바다 뿐 아니라 지하로까지 뻗쳤다. 90년대 들어서만도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상인동 도시가스 폭발사고, 서해 페리호 참사, 대한항공 괌 추락 사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대형 사고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뇌물.촌지수수는 관행(?)
바로 얼마 전에는 가건물 컨테이너가 철골조 정상건물로 둔갑, 어린 생명들을 무참하게 앗아간 '씨랜드' 참사가 일어났으며, 많은 사고가 연발하는 가운데 근래에는 대학 실험실에서도 폭발사고가 터졌고, '맹물 비행기'가 추락했으며, 울진 원전의 중수가 누출돼 그 원인 규명이 아직까지 오락가락하는 형편이다. 이들 끔찍한 사건.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과 그 미덕의 실종에 있다고 한다면 너무 소박한 시각일까.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뇌물이나 촌지 수수가 관행이 돼 버렸고, '급행료'를 줘야만 일이 제대로 되는 풍토다. 게다가 한탕주의, 허세와 허영, 배금주의의 노예가 된 졸부들, 검은 돈으로 이자놀이나 하는 불로소득꾼들이 우리 사회를 병을 더욱 깊게 밀어넣고 있다.
'도덕'이란 자신이 자신을 속이지 못하게 하는 '어떤 힘'이며, 법보다 큰 힘을 지니고 있다. 법의 힘이 '역(力)'이라면 도덕의 힘은 '강(强)'이기 때문이다. 특히 도덕은 남을 이기려는 힘(力)을 부끄럽게 만들고 스스로 이겨내려는 힘(强)을 길러준다는 점에서 깊이 되새겨야 한다.
##병의 뿌리 뽑는 일이 우선
일찍이 진(晉)나라에 도둑이 많아 백성들의 고통이 극심했다. 궁궐 안에 도둑질하는 신하가 많아 궁궐 밖에서는 떼강도가 판을 치는 난세였다. 임금은 그들을 소탕할 방법을 찾아 고심하다가 관상을 보며 속눈썹만 보아도 도둑을 가려낸다는 극옹(克雍)과 만나게 됐다. 하지만 현명한 조문자(趙文子)는 견해를 달리했다. 임금의 자랑을 들은 그는 극옹 한 사람으로는 개혁이 되지 않으며, 극옹은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라고도 내다봤다. 얼마 뒤 극옹은 도둑들에게 살해당했다. 당황한 임금은 다시 조문자를 불러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조문자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워 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기 바랍니다(民有恥心)"라고 고언했다.
열자(列子)의 '설부편(說符篇)'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맹자(孟子)의 '인간에게는 부끄러움이 없어서는 안된다(人不可以無恥)'는 말과 함께 오늘의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안겨준다.
오늘의 이 깊은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환부를 칼로 찢고 고름을 닦아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고름을 만들어내는 뿌리를 뽑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그 지름길은 맹자가 가르쳤듯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羞惡之心)'과 조문자가 내세웠듯 '민유치심'이 열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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