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최창국(논설위원)

딸들아!

이제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지도 일주일 정도가 지났으니 나름대로 마음의 정리는 되었겠지? 옛날의 어르신네들은 '일생지계재어소년(一生之計在於少年)이라 했어. 너희들은 지금 소년기의 정점에 와 있는 셈이야. 너희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수능시험 성적을 바탕으로 수많은 갈레의 인생길 초입에 들어섰으니까.

저마다 여린 마음때문에 한번씩은 해봤던 가채점을 아빠 엄마몰래 한두번씩은 더 해봤을테니까 지금쯤은 뭔가 자기나름대로의 진학방향이 섰을거야.

신문이고 방송이고 모두 쉬웠다는 지난해보다 보통 8점, 많게는 10점까지 성적이 올라간다니까 처음엔 무척 가슴 졸였을거야. 막상 뛰는 가슴 누르며 시험을 치른 본인은 수리탐구I의 주관식문제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언어영역은 그나마 모두 어렵다고들 했으니 체감난이도와 출제위원들의 높은 예상점수사이에서 적지 않은 갈등을 겪었을거야.

하긴 수험생들의 성적하락을 예측하는 전망도 일부나와 있으니 갈피가 잡히지 않기는 선생님들도 예외가 아닐걸. 솔직하게 말해 많은 아빠들은 현재의 시험제도에 대해 하고 싶은 말들이 또 있단다. 남의 나라 대학들은 뭐 '뉴 밀레니엄'아니래도 저마다 자신들만의 특성있는 대학을 만들고 인재확보를 위해 연구하는데 우린 붕어빵틀에선 찍어낸 문제들의 채점표를 갖고 일률적으로 도매상에서 소매점으로 물건 공급하듯 대학들의 정원을 채우고 있으니 아무래도 대학의 본질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느낌이야. 특성까지는 말고라도 개성마저 없으니.

기껏 특별전형을 한다는 게 무슨 30세이상의 고령자들을 우대한다거나 공무원들에게 혜택을 주거나 그것도 아니면 춤을 잘추거나 인기연예인에게 우대를 하는 것들이지.

딸들아!

그 옛날 공자님은 수업을 할때부터 제자들의 개성과 특성을 고려했단다. 자로(子路)가 어느날 '저희가 마땅히 가서 해야 할 일을 얘기 들었을땐 응당 쫓아가서 처리해야합니까?'라고 여쭤봤지. 스승은 '아버지나 형님이 계실땐 먼저 여쭤야 한다. 듣자마자 바로 가선 안된다'고 가르쳤어. 그러나 다른 제자인 염구( 求)가 똑같은 질문을 여쭸을때 스승은'마땅히 서둘러 처리해야지'라고 대답했단다.

보다 못한 또 다른 제자인 공서화(公西華)가 '왜 꼭 같은 질문에 두개의 가르침이 나옵니까'라고 여쭸을때 스승의 대답은 이러했다. '자로(子路)는 성정이 조급해 여유를 가르친 것이고 염구( 求)는 성정이 너무 느려 신속히 행동해야 함을 일깨워 준 것'이라고 했다.

어때? 우리가 가야할 길이 너무나 멀다는 느낌이 들지? 그러나 저러나 이제 또 논술고사를 치를 날이 한달남짓밖에 안남았지?

인터넷시대에 철든 너희들이 다정한 친구들에게 편지한장 제대로 써봤을까 하고 생각하니 아빠들의 가슴이 먼저 철렁 내려앉는구나. 두손을 머리뒤로 깍지끼면 주마등처럼 떠올랐던 숱한 상념(想念)들이 불을 켜고 원고지를 대하면 그 많았던 상념과 논리들이 봄볕에 눈녹듯 사라지고 멍하게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만 확인한 경험이 벌써 몇번 있을걸.

시간이 얼마없다고 조급해 할 일이 아니야.

갈 길이 아무리 바쁘고 멀더라도 나름의 생각과 식견을 차분히 체계화하는 과정을 느긋하게 연습하는 일은 결코 뛰어 넘어지는 일이 아닐거야.

딸들아!

중국얘기야. 송(宋)나라의 어느 농부가 생각해보니 모심기한지가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도대체 모가 자라는 것같지가 않았어. 몇달후면 추수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는 정말 큰일이다 싶어 작심끝에 논에 들어가 모를 조금씩 뽑아올렸어.

다음날 논에 가보니 죄다 물에 둥둥 떠있는 모만 발견했지.

이른바 '알묘조장'( 苗助長)이란 고사란다.

서둔다고 될일이 결코 아니지. 수능출제경향을 보니 어른으로서 너희들에겐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옷로비의혹사건이나 언론문건파문 등의 실상을 파악하고 나름대로 준엄한 논리의 개발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더구나.

이제 곧 꿈많던 여고생활을 뒤로하고 예비숙녀가 될터이지. 치렁치렁한 교복치마대신엔 보기에도 산뜻한 미니스커트를 입게 될거고 머리모양까지 다듬은 '주니어 패션'의 풋풋함을 표현하겠지? 그렇게 되면 아빠와의 사이도 지금까지 보다는 훨씬 성숙돼 부녀간에 친구가 될 수도 있을걸.

이게 모두 성인이 되는 과정일거야. 모든 아빠들의 바람은 건강한 사고와 흔들림없는 가치기준을 지닌 여성이 되는 걸거야. 그 어떤 경우에도 연××, 정××, 배××, 이××여인과 같은 유형이 되는 건 싫어!

아무래도 건강이 제일이란다.

1999년 11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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