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자노트-'아름다운 패자'

98년 7월5일 독일의 콜 전 총리는 독일이 크로아티아에게 3 대 0으로 지는 프랑스 월드컵 8강전을 직접 관전했다. 세계 각국의 VIP들은 '콜 총리가총선에서 패배할 징조'라고들 쑥덕거렸다고 한다.

23일 대구를 찾은 정몽준 후보가 한국 대 브라질 축구경기와 정 후보의 대선 행보의 관련성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정 후보는 "이길지 질지모르는데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한단 말인가"라고 되물으면서 "우리 첫 골이 먼저 터지지 않았으면 아마 대패했을지도 모른다"고 '전문가'다운 해설까지 곁들였다.

몇 해 전 정 후보가 지천명(知天命)을 앞 둔 나이에도 힘차게 축구장을 달리며 동료 국회의원들을 압도하는 모습은 정치인이라기보다는'그 나이에 몸 관리를 잘 한' 스포츠맨이었다.

그런 그가 월드컵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지난 9월 17일 대선 레이스에 들어갔다. 재벌2세, 돈으로 권력을 사려 한다는 비난의 소리도 없지 않았다. 그러다가 70일 만에 레이스를 그만뒀다.

그러나 그에게 중도포기라는 비판보다는 오히려 '약속'을 지킨데 따른 호평이 더 많다. 그가 25일 오전노무현 후보와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 그 결과에 두 말 않고 깨끗이 승복했기 때문이다.

후보단일화의 정당성 여부는 논외다. 정치적으로 부당성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고 국민들의 40% 가까이가 반대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후보의 약속 준수는 승복 문화가 정착된 경기장이 아니라 불복과 변절 그리고 온갖 명분을 둘러대며 말바꾸기가 난무하는 우리 정치판에서일어난 '전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라는 점에서 평가에 인색할 수 없다.

노-정 단일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예단했다. 승복보다는 불복의 사례를 훨씬 더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흔히들 스포츠의 세계는 등수보다는 룰을 지키고 판정에 승복하며 최선을 다하는데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스포츠가 사랑받는 이유다. 반칙과 판정불복이 판을 친다면 관중이 몰릴 리가 없다. 우리 정치의 인기가 바닥인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 후보의 이번 약속 준수를 가리켜 '스포츠맨십을 정치판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들 하는지도 모른다. '승자보다 더 아름답다'라는 평가도 나왔다. 우리 정치에서 '희망을 보았다'는 의미가 어느 때보다 더 크게 가슴에 와닿는다.

llddk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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