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중진.중견작가 콩트 릴레이-당신은 사바세계에...

소화제와 변비약, 혈압약, 안구건조증에 쓰는 인공눈물약, 소염진통제, 쌍화탕 한박스. 근육통에 붙이는 파스. 먹는 약, 바르는 약, 넣는 약. 어머니의 늙고 노쇠한 몸을 한달 동안 그럭저럭 지탱하게 할 약들이 작은 배낭으로 빼곡 찼다. 그저 사람이나 집이나… 궁싯거리며 나머지 말을 삼켰다. 늙으면 심신은 낡은 자동차나 아파트처럼 고장이 잦고 항상 언제 어떻게 공격해올지 모를 복병을 거느리게 되는 것이다.

공동식당의 밥이 매양 그 타령이라 지겹다는 말에 햇반과 라면, 밑반찬, 간식거리까지 챙기니 짐이 솔찮았다.

나오다가 우편함에서 엽서를 보았다. 독실한 불교도인 친구가 보낸 엽서였다. 파스텔 톤의 수채화로 푸른 바탕에 연연한 분홍빛의 연꽃이 흘린 듯한 붓질로 그려져 있고 "당신은 사바세상에 꽃으로 오셨습니다" 라는 글귀가 박혀 있었다.

꽃이라? 향기롭고 아름답다는 뜻인가, 꽃처럼 한철이 지나면 속절없이 져버린다는 뜻인가. 남에게 기쁨을 준다는 뜻인가, 기쁨이 된다는 뜻인가. 기쁜 일에도 슬픈 일에도 꽃은 빼지 못할 장식이다. 결혼식에도 장례식에도 꽃으로 치장한다.

이 세상이 바로 극락이고 천국임을 알게 하는 것이 종교의 궁극적 목표라고 친구는 누누이 말하지만 나는 인생이 한갓 농담에 지나지 않든 풀 끝에 맺힌 이슬이든 한바탕의 꿈이든 이 세상은 고해이고 눈물의 골짜기이고 우리는 우연히 던져진 존재로서 지상의 뭇목숨들과 다를 바 없이 생물로서의 한살이를 마치고 가는 것이라는 메마른 인생관을 갖고 있다.

다음 세상을 믿지도 않거니와 설사 그곳이 낙원이라 해도 다시는 생명을 가진 어떤 것으로도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선문답을 싫어하는 나에게 그 간단한 글귀는 다소 기만적이고 무책임하고 의미없는 멋부림처럼 보여졌다.

걸음이 무거운 것은 짐의 무게만은 아니었다. 한달에 한번 어머니를 보러 가는 날은 늘 짐보다 마음이 복잡하고 무거웠다. 저 먼곳으로부터 나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어머니의 검질긴 시선이 벌써부터 나를 얽고 있었다.

어머니가 거주하는 실버타운은 시외버스를 타고 두 시간택이나 걸리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접경지역으로 큰길에서 내려서도 산길을 2㎞ 정도 걸어가야 한다. 버스는 깊은 계곡을 따라 한없이 산굽이를 굽이굽이 휘돌았다. 한달 전만 해도 나목으로 뒤덮인 먼산의 잔설이 히뜩하고 얼어붙은 물줄기가 계곡 틈으로 보였는데 산은 맑은 녹빛을 띠며 푸릇푸릇 해지고 있는 참이었다.

참 깊고도 깊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나는 문득 언젠가 이와 똑같은 상황에서 같은 말을 했다는 친숙한 느낌에 휩싸였다.

그랬다.

어머니와 함께 처음 양로원을 찾던 이태 전 봄 산과 들에 꽃피고 새 울던 꼭 이맘때였다.

"옛날에는 호랑이도 나왔겠다, 산적떼들도 나왔겠다. 멀고도 멀고 깊고도 깊구나".

어머니는 까마득히 높은 산과 깊은 골을 보며 말했었다.

차만 타면 때없이 자울자울 어린애처럼 조는 어머니인데도 내내 잠이 없었다.

어머니의 마음을 오갔을 그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을 마음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남향받이 언덕위의 붉은 벽돌건물은 출입문 앞이 해무리를 두른 듯 환했다. 꽤 둥치가 굵은 목련나무에 꽃이 피고 있었다. 건물안은 괴괴하달 만큼 조용했다. 햇살이 밝아도 어딘가 음울하고 한없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고여 있는 시간의 무게 때문일까. 복도에 놓인 긴 의자에 나와 앉은 대여섯명의 노인들에게 목례를 하고 지나쳤다.

"109호 할머니 딸이구려. 부모에게 저리 잘하니 복받을 거유".

그네들의 눈길이 나를 찬찬히 훑었다.

그들은 언덕길을 올라오는 내 모습을 진작부터 보고 있었을 것이다.

종일가야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한 곳이고 통행로는 가파른 비탈길 하나뿐이어서 창에 매달려 밖을 내다보는 것외에 일이 별로 없는 그들의 시선에 포획되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부옇고 정기없는 눈길이 끈덕지게 따라오며 소리낮춘 수근거림으로 실꾸리 풀리듯 풀려나오리라는 것을 알기에 걸음이 빨라졌다.

아무리 공손하고 다사로운 표정을 지어도 그들에게 나는 부모버린 자식이상이 될 수 없음을 안다. 어떻게 부모를 착취하고 소외시키고 학대하고 종내는 내치는 수순에 대해 그들보다 더 잘아는 사람들이 있던가.

"왜 이렇게 오래 사는지 모르겠다.

오래살면 느이들이 고생이지. 그저 오늘밤에라도 자는 듯이 갔으면 좋겠다".

"자꾸 죽고싶다는 소리 하시면 명은 길어지고 복은 달아난대요.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그리 어렵다는데 건강하게 잘 사셔야죠".

어머니와의 대화는 늘 그렇다.

어머니가 바라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나는 무책임한 소리로 딴청을 부린다. 부모와 함께 살 수 없는 난처한 이유들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고부간의 성격이 안맞아서, 생활이 어려워서, 입시생 자식이 있어서, 여분의 방이 없어서, 남편이 까탈스러워서…. 서로간에 말해지지 않는 부분들, 그러나 너무도 자명하고 단순한 사실과 본심을 감추느라 이론은 장황하고 궁색다.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을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맡기고 자신의 생활을 가졌던 것처럼 늙으면 반대로 젊은 사람의 생활에 가로거치지 않게끔 어딘가로 비켜줘야 한다고, 자존심과 자기 품위를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데 자식들 눈치보며 위축되어 살면서 맘 상할 것이 없다고, 우리의 노년도 그러할 것이라고 했다.

등골빠지게 힘들여 교육시킨 탓에 제법 식자가 든 자식들은, 가족은 가장 가까운 타인이라거니 우리도 자식들에게 준 것만큼 절대로 받지 못한다고 그것이 생명체의 이치라고. 결국은 당신이 부담스럽고 내 생활에 끼어드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시간적 경제적 정신적 정서적인 것들을 나눌 마음이 없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였다.

자식은 부모가 돌아가야 비로소 철이 든다는데 우리 역시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면 많이 울고 회한이 깊을 거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간교함.

"어젯밤에는 밤새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려 잠을 잘 못잤단다.

하도 오랜만에 듣는 아이소리가 반가워 나가봤더니 아무도 없어. 나뿐이 아니야. 이방저방에서 부스스 일어나 나오더라. 암내낸 들고양이 소리였겠지. 늙으면 귀도 이상해져".

"이상도 하지". 어머니의 말은 늘 그렇게 시작된다.

곰곰 생각해보면 사는 일치고 이상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나.

"서너살 때쯤 되었나, 머슴의 등에 업혀 개울을 건너갔었지. 그때 맑은 물에 단풍잎이 떠가던 것이랑 물밑 돌들이 잡힐 듯이 영롱하게 떠오르는구나".

"어릴 때 시골집에서는 담벼락에 시레기다발을 걸어두었거든. 그게 바람이 불면 시스렁시스렁 소리를 내는데 어찌 무섭고 쓸쓸하든지 이불을 들쓰고 그만 울었지 뭐냐…".

세월 속에서 바래지 않고 영롱히 살아 있는 기억들이 사무치며 문득 언제부터인가 어머니의 이야기가 항상 유년기 그리고 오래 전에 죽은 옛사람들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는 걸 느낀다.

어머니는 나날이 조그만 아이가 되어 기억속으로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고 있다.

"사는 게 소꿉놀이와 다를 바 없어. 한바탕 늘어놓고 동무들과 엄마니 아기니 하며 살림살고 놀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이제 그만 놀고 들어오너라 부르면 있던 자리에 다 놔두고 뿔뿔이 돌아가잖니? 우리네 인생도 다 그렇구나".

어쩌면 당신 인생의 전부였을 많은 자식들을 낳고 기르며 치렀던, 평생에 걸친 삶의 노역과 기쁨과 근심 걱정은 잠깐 꾼 꿈속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해가 설핏해질 무렵 돌아가기 위해 일어서는 나를 주춤걸음으로 굳이 따라 나서던 어머니는 출입문 앞 목련나무를 올려다보며 아, 낮은 탄성으로 멈추어섰다. 그사이 꽃은 더욱 만개하여 수천수만의 흰불꽃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경사가 급한 가풀막이라 더 이상 배웅할 엄두를 못낸 조그만 어머니가 흰머리를 이고 꽃핀 나무 아래 서 있다.

언덕길을 다 내려와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을 때 나는 얼핏 어머니가 꽃무리속으로 둥실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맑게 닦인 창마다 매달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저마다 한세상 품고 살아온 세월이 질곡이었기에 한송이 꽃일 수밖에 없는 노인들의 얼굴이 함께 떠오르고 있었다.

▨약력

▲1947년 서울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동서문학상 수상 ▲창작집으로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불꽃놀이' '새' 등 작품다수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