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딸로서 평생을 아동복지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지요".
머나먼 타국에서 35년간 아동복지사업을 하다가 지난 2000년 1월 건강 때문에 은퇴한 옥잉애(71.여.본명 잉애 엘렘캄프) 전 소화보육원 원장은 대명9동 자신의 집에서 여유와 평화가 깃든 말년을 즐기고 있었다.
독일인인 그녀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난 1963년. 당시 유치원 교사로서 해외선교에 관심이 많던 그녀는 대구에서 아동복지사업을 하던 한 오스트리아인 자원봉사자로부터 '가난하고 어려운 아이들이 대구에 많다'는 편지를 접한 뒤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구에 도착한 뒤 검사동 사회복지시설 'SOS어린이마을'에서 봉사일을 시작한 그녀는 엄마가 일하러 나가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동들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대구시로부터 40평의 땅을 빌려 1965년 대명3동에 '소화보육원'을 설립했다.
"피난민들이 많이 살았던 당시 대명 3동에는 초가와 무허가집이 허다했으며 수돗물을 받으려면 새벽 4시부터 줄을 서야 할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행상과 고물장수로 나서던 주부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녀는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편지를 전세계 후원자들에게 보냈고 닭.돼지 등 가축을 손수 키웠다.
미국에서 들여온 구호물자인 옥수수, 밀가루, 통조림고기, 기름 등을 이용해 아이들에게 튀김과자를 만들어 먹이는 등 자신의 아이처럼 애정을 쏟았다.
소화보육원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 아이를 맡기려는 부모들이 날로 늘어났다.
1972년 대명4동에 분원을 만들고 1988년에는 상인동으로 어린이집을 옮겼다.
지금은 원아들이 350명에 이른다.
아이 돌보는 일 때문에 결혼도 하지 않은 그녀였지만 1999년 척추디스크 때문에 거동조차 불편해지자 은퇴를 결심하게 됐다.
탁아사업을 함께 하던 한국인 친구가 지금 살고 있는 30여평의 집을 마련해 줬고, 독일 친구들이 그녀 모르게 넣어 왔던 연금수입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별로 없다고 했다.
요즘은 매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일주일에 세 번은 한국인에게 독일어를 가르치고 있다.
"몸이 다 나으면서 책읽고 집안 가꾸고 사람 만나 대화하는 하루하루가 너무 즐겁다"며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창환기자 lc156@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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