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민아, 그렇게 쉼표를 무시하면 어떡해. 여기 반 박자 쉬고 들어가야지. 그래야 이 곡이 제대로 살지. 어디 다시 한 번 해봐".
그 전에도 여러 번 들었던, 아내가 딸아이의 바이올린 연습을 나무라는 소리인데 그 '쉼표'란 단어가 내게 새롭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음악에서 우리는 보통 음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음과 음 사이의 공간이 그 음을 음악으로 만든다는 데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 만나지 못해 안달하는 것만 안타깝지, 서로 떨어져 있으므로 그리움이란 공간이 그들의 사랑을 더 깊게 한다는 것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릇과 방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가치가 있고 바퀴의 중심도 비어 있기에 수레가 굴러간다.
그 공간의 의미는 동양화에서 더욱 명확히 나타난다.
동양화는 여백의 예술이다.
소나무 아래에 무심히 앉아 있는 노인을 그린 동양화에서 우리는 쉽게 그 소나무와 노인에게 눈이 가지만 그 그림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뒤의 여백인 無나 空의 세계에 있다.
결국 인식의 중요한 초점이 소나무와 노인에게서 그 뒤의 공간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시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시의 간결하고 함축된 말 뒤의 침묵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그 시의 언어보다 더욱 크다.
이처럼 존재의 세계는 비 존재의 세계를 통해서만 그 유용성이 더욱 발현된다.
음과 음 사이의 쉼, 방과 그릇 속의 빈 공간,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와 시간이 주는 그리움, 표현한 대상 뒤의 여백, 함축된 말 너머의 침묵, 이런 비 존재의 중요성을 더욱 인식해야 한다.
내 인생에 빈틈 없이 무엇으로 가득 채우려는 나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자존심으로, 지식으로, 물질로, 상대에 대한 기대로 채우려는 채움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비움의 길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이기심, 지혜가 되지 못하는 지식, 갈증만 더하는 물욕, 사랑의 이름으로 채색된 집착, 이런 결핍의 심리에서 벗어나 오히려 이것들을 하나하나 버릴 수 있는 비우는 삶이 나를 더욱 풍요롭게 할 것이다.
겨울 들판 같이 비어 있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본질을 바라 볼 수 있는 밝은 눈이 아니겠는가.
서억수 안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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