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간데스크-변화의 시대 시민이 할일

어느 동료가 옷소매를 슬그머니 잡아 끌었다.

"탁구장이 생겼다니 한 판 해 봅시다.

이제 몸 관리할 때도 됐잖소?" 기자가 탁구 라켓을 쥐어 본 것은 20년도 더 전인 1970년대 중반 몇 년 동안이 전부였다.

그러나 탁구장에는 기자를 내리칠 죽비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꼼수가 되살아 나 스스로를 놀라게 한 것이었다.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 탁구를 시작하느라 쌓았던 업은 그 오랜 세월을 지내고도 기자의 몸놀림을 지배하고 있었다.

진리의 말씀은 선명했다.

'너는 변하기 힘든 존재이느니라'.

*인간은 변하기 힘든 존재

별로 닮은 것 같지 않은데도 문득 인디언 웨일즈 할아버지의 말씀이 연상되었다.

소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속의 이 할아버지는 칠면조 잡기를 통해 손자를 깨우친다.

생각만 바꾼다면 얼마든 뛰쳐 나올 수 있는 조그만 함정에 빠졌는데도 칠면조들이 그냥 꽥꽥거리고만 있자 조손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할아버지, 입구가 꽉 막힌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머리를 숙이기만 하면 나올 수 있을 텐데 칠면조가 왜 저러고 있지요?" "칠면조란 놈들도 사람하고 닮은 데가 있어. 이것 봐. 뭐든지 다 알고 있는듯이 하면서 자기 주위에 뭐가 있는지 내려다 보려고는 하지 않아. 항상 머리를 너무 꼿꼿하게 쳐들고 있는 바람에 아무 것도 못배우는 거지".

며칠 전에는 새로 당선된 유시민 국회의원의 등원 첫날 옷차림이 시비거리가 되었다.

양복 정장을 않고 캐주얼 차림으로 왔다고 해서 여야 없이 적잖은 의원들이 선서 받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품위를 지키지 않았다" "국민에 대한 예의도 없느냐"는 말이 쏟아졌고 상당수 의원들은 자리를 뜨기도 했다고 신문들은 전했다.

왜 버릇은 수십년을 보내고도 여전히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은 무슨 업으로 칠면조마냥 아래를 내려다보기 힘든 것일까. 국회에서는 왜 양복만 입어야 하는 것일까. 차라리 한복 정장을 갖추도록 의무화하지는 왜 못했을까. 스스로 변하기가 얼마나 쉽잖은지, 변화를 받아 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생각케 했다.

의문은 더 커질 수도 있었다.

국회의원들이 저다지도 달라붙어 차리려고 난리를 쳐야 할 품위와 국민에 대한 예의가 기껏 옷차림 정도의 것일까. 나라일을 열심히 하라고 뽑아 보내놨더니 제 잇속이나 챙겨 구속되거나 수사받는 의원들에 대해서는 왜 분노하지 않는 것일까. 그게 품위를 지키고 국민에 대한 예의를 다하는 짓이어서일까.

유시민 의원 '사건' 바로 전에 벌어졌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희한한 재판에 대해서는 왜 국회의원들이 가만 있나. 가진 현금이 30만원 뿐이라는 강변에는 사법권과 국가를 모독하고 국민을 우롱한 혐의가 짙다.

그때문에 모욕감을 느낀 시민들이 "모금 운동이라도 해서 돈을 모아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할 정도인데도, 의원들은 말이 없었다.

그게 중요하냐 옷차림이 중요하냐?

국가정보원 원장이니 기조실장이니 하는 사람들의 임명이 근래엔 심각한 정쟁 대상이 돼 있다고 한다.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얘기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엔 그런 국회의 판단을 대통령이 무시했다고 해서 물고 늘어졌다는 것이다.

반면 민교협과 학술단체협의회 등의 교수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오히려 정보위 국회의원들의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앞으로 달려가기에도 바쁜 시국에서 어느 시대인지도 모르고 낡은 시대의 색깔시비나 벌이고 있다는 게 그쪽 주장이었다.

*변화는 시민들이 만드는 것

누구 말이 맞는지를 따지다가는 또다시 시비에나 휘말리기 십상이겠지만, 한 가지는 명확해 보인다.

종전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전면에 부상했고 지금 뭔가 변화가 시도되고 있으며, 그보다 적잖은 숫자의 사람들이 그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 중 어느 힘이 이기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두 힘이 팽팽히 계속되기만 해서는 우리 사회가 혼란에 빠져들 위험이 높다.

두려운 일이다.

이제 시민들이 나서야 할 차례라고 기자는 생각한다.

두 힘의 다툼을 사려깊게 살피고 어느 쪽 배후에 문제가 배어 있는지를 가려내려 노력하기를 제안한다.

변화하려는 힘과 변하지 않으려는 힘의 다툼을 남의 일 보듯 해서는 안된다는 얘기이다.

시민들이 사회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주인 노릇을 포기하고 가벼이 정치판의 편가르기에나 합세했다가는 우리 후손들이 똑 같은 혼란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종봉 사회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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