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聖書)에 따르면 인간의 저주는 카인에서 비롯됐다.
이브의 아들인 그는 항상 경쟁관계였던 동생 아벨을 저주한 나머지 죽이고 말았다.
그때 여호와는 카인을 낙원에서 추방하면서 '너는 저주를 받으며 이 땅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땅은 네 동생의 피를 빨아먹었으니 말이다'고 했다.
역사의 기록에 저주(咀呪)를 통해 행복을 얻은 사람은 없다.
저주라는 운명의 쇠사슬에 얽혀 결국 스스로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문학가는 '고아의 저주는 천상에 있는 영혼을 지옥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고 했을 거다.
▲요즘은 카인식 저주를 넘어서는 범죄들까지 끊이지 않아 우리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대구 지하철 대참사를 부른 방화 사건은 떠올리기조차 고통스러운 가운데 별다른 이유 없이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화풀이성' 범죄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만도 한 노숙자가 지하철역에서 경관 부인을 떼밀어 전동차에 치어 죽게 했으며, 길을 가던 여성에게 한 10대 남자가 흉기를 휘둘러 2명을 다치게 했다.
▲경찰에 잡힌 노숙자는 '어깨를 부딪친 뒤 욕을 해 화가 났는데 때릴 수도 없고 해서 순간적으로 그냥 밀어 버렸다'고 했으며, 10대 남자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화가 나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하니 기가 찬다.
이 같이 우리 사회는 '묻지마'식 범죄의 일촉즉발 위험성에 그대로 노출돼 있는 느낌이다.
현실의 어려움을 자기 탓보다는 사회나 타인의 몫으로 떠넘기는 분위기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유엔에서는 행복지수를 조사하면서 '행복은 연습'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물이 반잔 남았을 때 '반잔 밖에 남지 않았다'고 느끼는 것과 '아직도 반잔이나 남았다'고 하는 생각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부정적인 시각이냐, 긍정적인 생각이냐가 낳는 격차인 셈이지만, 행·불행은 바로 그런 시각과 생각 차이에서 비롯되며, 어떤 연습을 하느냐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마련이다.
행복을 찾아 헤매다 돌아와 보니 바로 그 자리에 있더라는 칼 뷔세의 시가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는 구성원간의 갈등을 증폭시킬 뿐 아니라 불특정인을 향한 막연한 분노의 표출에 따르는 '묻지마 범죄'를 비켜서기 어렵다.
한 사람의 순간적인 분풀이 심리나 적대감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치는 재앙의 넓이와 깊이는 가공할 정도로 확대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도층부터 달라지고,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들이 나눔과 베풂의 정신, 상대적 박탈감과 증오심을 함께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에 입각한 윤리·도덕의 확립, 사회 보장제도의 정비도 그 관건이 아닐 수 없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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