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 대가야-(30)육십령.팔량치를 넘어서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산은 없고, 흰 눈만 펼쳐졌다.

눈이 부셨다.

그러나 바람은 세찼다.

찬바람에 발목까지 푹푹 잠겼지만, 1천500여년 역사의 자취를 밟는다는 게 여간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5분쯤 고개를 오르자 서쪽 너머로 전북 장수의 산과 들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백두대간 남덕유산(1천507m)과 백운산(1천279m) 사이에 자리한 육십령(六十嶺;734m).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전북 장수군 장계면의 경계에서 영.호남을 잇는 고개다.

삼국시대 이후 들끓는 도적 떼를 피하기 위해서는 산아래 주막에서 족히 60명은 모여야, 그것도 죽창과 몽둥이를 들고서야 넘을 수 있었다는 곳이다.

대구에서 88고속도로를 달리다 함양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서상나들목을 빠져 나왔고, 다시 26번 국도를 타고 승용차로 10여분쯤 달려 도착한 육십령이었다.

문명의 이기에 편승해 손쉽게 도달한 고개였지만, 그 때 대가야인들은 산 넘고 물 건너 피땀 흘려가며 당도했을 터. 땅을 가꾸고 또 새 땅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렇게….

육십령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남쪽으로 내달리자 함양읍과 전북 남원을 경계로 한 팔량치(八良峙;513m)에 닿았다.

소백산맥 연비산(843m)과 삼봉산(1천187m) 사이에 우뚝 선 고개. 남강의 지류인 위천(謂川)에 합류하는 팔량천이 동류하고, 역시 남강의 지류인 임천강(臨川江)이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멀리 남원의 '아영들'과 '운봉고원'이 내려다보였다

육십령과 팔량치는 대가야가 백두대간을 넘어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만 했던 두 고개였다.

가야산을 모태로, 가천과 야천을 젖줄로, 야로 철을 무기로 했던 대가야. 300년대 전반, 변한의 소국인 '반로국'(半路國)에서 '가라국(加羅國)'으로 거듭난 대가야는 궁성을 짓고, 산성을 쌓으며 도읍지 고령의 방어망을 구축했다.

'피의 역사'를 준비하며 가야 제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전(前) 단계였다.

사방으로 방어망을 확고히 구축한 대가야는 400년대로 접어든 뒤 북쪽 성주 세력과 동쪽 신라를 견제하면서 서서히 서, 남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황강 중류의 길목인 경남 합천군 봉산면 송림리 반계제 일대를 손아귀에 넣고, 강줄기를 따라 황강 상류의 거창과 남강 상류의 함양을 향해 거침없이 달렸다.

백두대간 소백산맥을 넘는 서쪽으로의 진출로는 거창과 함양뿐이었다.

거창읍에서 국도를 따라 남동쪽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한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고분군'. 돌널무덤(石槨墓)이 있는 남하초교 뒷산 구릉에서는 황강이 한 눈에 들어왔다.

창원대박물관 정밀지표조사에서 소가야(경남 고성) 양식 일부 토기와 대가야 양식 굽다리 접시(高杯), 그릇받침(器臺), 목 긴 항아리(長頃壺) 등이 나온 무덤이다.

초창기 소가야와 교류를 벌이다 400년대 중반 이후 대가야에 편입된 지역이다.

무릉리 고분군에서 황강을 따라 서쪽 상류로 향하다 보면 경남 함양과 전북 무주 방향의 교통로가 교차하는 거창군 마리면 말흘리 '진산마을' 뒷산에도 대가야 세력이 거쳐간 흔적이 나온다.

거창읍을 관통해 황강 상류에 합류하는 위천의 상류에 자리한 '말흘리 고분군'이다.

1985년 진주박물관이 발굴한 무덤 3기 중 2호 무덤에서 뚜껑있는 목긴 항아리, 원통모양 그릇받침, 덮개(蓋) 등 대가야 토기가 1점씩 출토됐다.

그러나 1호 무덤에서는 소가야의 영향을 받아 현지에서 만든 사발모양 그릇받침(鉢形器臺)과 삼각형 창(窓)이 난 굽다리 접시, 아가리 넓은 항아리(廣口壺) 등이 나왔다.

무릉리 고분세력과 마찬가지로 당초 소가야의 영향을 받던 세력이 이후 대가야 세력권에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을 넘어 전북 남원 장수로, 남강을 따라 경남 산청 진주로 통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 함양.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거창을 비껴 남류하는 남계천(濫溪川)과 백운산에서 발원해 남동류하는 위천은 바로 이 곳에서 서로 만난다.

남계천 상류에 인접한 함양군 수동면 '상백리 고분군'에는 중형 무덤 10여기가 있다.

지난 72년 동아대박물관 수습조사에서 대가야 양식 그릇받침, 뚜껑 있는 목 긴 항아리와 목 짧은 항아리, 굽다리 접시 등이 나왔다.

말안장, 말띠 드리개, 말 재갈, 화살통, 고리자루 큰 칼 등 지산동 고분군에서 나온 것과 같은 양식의 마구(馬具)와 무구(武具)도 출토됐다.

이 고분군에서 남계천을 타고 10km 가량 내려가면 대가야 토기만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함양읍 '백천리 고분군'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이 고분군은 88고속도로 함양나들목에서 동쪽으로 1km쯤 떨어진 백천리 '척지마을' 뒤편에 20여기의 중.대형 무덤으로 이뤄져 있다.

이 무덤의 내부구조와 출토 유물은 대가야 양식 일색이다.

거창을 편입한 대가야가 400년대 후반 또는 500년대 초에 세력을 확장했던 곳이었다.

거창과 함양을 통해 서쪽 루트를 뚫은 대가야는 동시에 남쪽 루트인 산청에도 눈을 돌렸다.

지리산을 돌아 내려온 경호강이 함양을 거쳐 내려온 남강과 합류하는 유역인 산청은 대가야가 낙동강을 거치지 않고 해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합천-거창-함양-진주-하동의 교통로를 잇는 길목이었다.

경호강이 바로 곁에서 비껴 흘러가고 있는 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생초 고분군'. 함양 백천리 고분군에서 남강 하류로 약 10km 내려온 곳이다.

어서리 마을을 배경으로 조롱박 2개를 엎어놓은 듯한 산 구릉 위에 펼쳐진 이 고분군에서는 79기의 가야 무덤이 확인됐다.

대가야 토기와 철기, 장신구 등이 수백 점 쏟아진 이 무덤의 구조와 유물양식으로 봐 400년대 후반이나 500년대 초반 대가야가 완전 복속한 지역으로 추정됐다.

또 가야고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동 거울(銅鏡)과 스에키(須惠器;왜 토기) 11점, 백제계 토기가 함께 나와 대가야를 둘러싼 주변 세력과의 관계를 캐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전망이다.

2002년 경상대박물관이 이 일대 조각공원 조성을 앞두고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산청군은 향후 주민들이 조각공원을 거닐며 무덤 속까지 살펴 볼 수 있도록 봉분을 쌓지 않은 상태로 내부를 공개할 방침이다.

생초고분군에서 경호강을 따라 다시 남쪽으로 10여km 떨어진 산청군 신안면 '중촌리 고분군'. 중촌리 '하촌마을' 뒤편 월명사로 오르는 능선 왼편에 분포하고 있는 이 무덤은 나무널(木槨)에서부터 가로로 구멍을 낸 돌방무덤(橫穴式 石室墓) 단계까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금동으로 장식한 마구, 봉황이 새겨진 고리자루 큰 칼 등 대가야 양식 무덤구조와 유물을 갖춰 생초리와 함께 400년대 후반 이후 대가야가 병합한 지역이다.

대가야는 이렇게 거창.함양을 거쳐 백두대간을 넘봤고, 다시 산청을 거쳐 남으로 진주, 하동을 향해 말고삐를 죄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고령.김인탁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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