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지 삼천리에 실린 나혜석의 '이혼백서'는 또 하나의 '스캔들'이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소설가인 나혜석은 외간남자와 염문을 뿌려 이미 스캔들의 주인공이 됐다.
이 사건으로 이혼 당한 그는 '이혼백서'를 통해 자신이 조선사회 인습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이나 도쿄 사람들은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그는 우리사회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함으로써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 같은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남편에게 재산 분할과 자녀 양육권을 요구했다.
또 '에미를 원망하지 말고 제도와 인습을 원망하라'며 4남매에게 자신은 탕녀가 아니라 인습의 피해자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동의를 얻지 못했다.
스캔들과 함께 나혜석은 조선사회에서 사라졌다.
무연고 병동에서 홀로 죽기 10여 년 전에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스캔들 이후 세인들은 나혜석의 재능이나 업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혼 후에도 그는 작품 활동을 계속했지만 평단과 대중은 싸늘한 눈길을 보냈다.
탕녀의 낙인이 찍힌 이상 서양화가로 소설가로서 그의 재능과 업적은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었다.
나혜석으로 대표되는 '신여성'들의 세속적인 삶은 가출.자살.일탈 등 파멸로 귀결되고 있다.
우리는 이들을 탕녀로 몰아가는 세간의 평가에 반대하기 위해 이들을 페미니스트라 추켜세우고 싶지 않다.
다만 '신여성'들의 삶이 대부분 파멸로 귀결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인습과 제도에도 문제가 있음을 방증 한다.
'신여성'들은 관습과 제도에 맞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획득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들은 자유 연애와 자유 결혼, 나아가 자유로운 이혼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더 나아가 모성의 신화를 깨뜨리는 데 앞장섰다.
그 결과 사회적 저항에 부딪혔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
구성원간의 책임을 전제로 유지되는 가족은 개인에게 사적욕망의 억제를 요구할 수 있다.
건강한 사회는 개인의 사적욕망을 제한할 수 있다.
남편 김우영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나혜석을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예술가로서 나혜석을 패배자로 규정할 권리는 없다.
사적욕망의 분출이 삶을 통째로 파멸시키는 절대적 이유가 된다면 건강한 사회라고 하기 어렵다.
재능과 업적, 과오는 각각 따로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
조선과 일본의 대표적 신여성 나혜석과 히라쓰카 라이초우의 생애를 비교해 보면, 우리사회 편견의 두께를 짐작할 수 있다.
나혜석이 사회적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행려병자가 된 반면 히라쓰카는 불법인 동거를 하고도 여성권익 신장 운동 등에서 지도자로 활약했다.
'신여성' 나혜석의 인식에도 한계는 있었다.
나혜석은 염문의 상대였던 최린에게 정조유린의 책임과 함께 장래를 보장하라며 위자료 청구소송을 냈다.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남편과 사회통념을 향해 '전근대적'이라고 비난했던 그였다.
위자료 청구는 결국 나혜석 자신도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두진기자earful@imaeil.com
'해인사 풍경'은 최린과 염문으로 이혼하고 도덕적 이단자로 낙인찍혀 거처 없이 떠돌던 말년의 작품(37년)이다.
불가에 귀의한 친구 김일엽을 찾아 해인사에 갔을 때 묶었던 해인사 옆 홍도여관에서 그려 주인에게 선물했다.
참고자료:나혜석 평전(정규웅).국립 중앙도서관.국가지식정보통합검색 시스템.역사신문.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이구열)
-역사신문 사설은 역사적 사건 당시 오늘날과 같은 신문이 있었다면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생각해보는 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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