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눈 쌓인 응달에서 이리저리 바람에 쏠린다.
비바람을 막아낼 힘도, 안식의 공간을 제공할 여력도 없다.
사람들은 떠난다.
더 이상 바람막이나 휴식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잎은 떨어지고 가지는 삭아든다.
그렇게 나무는 스러지고, 그 썩은 살은 또 다른 나무의 살이 된다.
스러진 나무도 한때 대지의 정기를 빨아들인 뿌리깊은 나무였다.
무성한 잎과 넓게 퍼진 가지는 대지의 풍요를 더한다.
신록의 계절을 알리고, 푸르름과 선선함, 오색 단풍으로 계절의 절묘한 바뀜을 전한다.
나무는 항상 말없이 그 자리에 서서 자연과 인간을 이어왔다.
아버지의 존재는 바로 나무와 닮아있다.
앙상한 나무처럼 늙고 병든 아버지는 더 이상 쪼들린 살림을 바로 잡을 수도, 가장으로 우뚝 설 기력도 없다.
그러나 유년시절, 아버지의 존재는 한없이 크기만 했다.
세상의 든든한 버팀목이요, 아늑한 쉼터였다.
아버지의 어깨는 언제나 기댈 수 있는 푸근한 나무그늘과 같았다.
그러나 짓눌린 어깨가 처지고, 주름살이 패이면서 아버지의 존재는 점점 작아져 간다.
화가 박수근(1914~1965년)의 작품에는 나무가 자주 소재로 등장한다.
마을 어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나무다.
그러나 그 나무는 가지가 잘리고, 구부러지고, 앙상한 가지를 달고있다.
잎이 무성한 나무는 찾아보기 어렵다.
죽은 나무 아니면 겨울나무가 대다수다.
박수근의 그림에는 남자, 특히 장년의 가장으로 표현되는 남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어린이, 아낙네, 노인만이 나무 속에서 화폭을 구성하고 있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씨는 "남정네의 부재가 박수근 풍속화의 한 특징"이라며 "대신 공간을 떠받치는 나무가 가장, 즉 아버지를 대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수근의 작품 '나무와 여인 Ⅰ'(1956)에는 나무 한 그루를 사이에 두고 아이를 보는 여성과 행상을 하는 여인이 등장한다.
집안 일과 살림살이를 뒷받침하는 경제활동이 모두 여자의 몫임을 시사하고 있다.
나무는 구부러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나무는 두 여인 사이에 우뚝 서 있고, 마치 세상을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이나 안식처로 보이기도 한다.
평론가 이혜숙씨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 전쟁의 상처 등을 겪으면서 전통적인 아버지의 존재는 약화됐다"며 "나무는 그림자처럼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없어서는 안될 아버지의 존재를 표상한다"고 말했다.
박수근의 나무는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에서도 가장으로서의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나타내고 있다.
강원도 양구의 한 산골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다.
유년시절, 아버지는 광산업에 손을 댔다가 파산해 가계가 크게 기울었고, 이후 양잠 지도원으로 말단 봉급생활을 하며 재기를 노렸으나 무산됐다.
6.25때 가족들과 함께 월남한 뒤 박수근은 군산의 부두에서 막일을 하고,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었다.
현대사의 격변 속에서도 가정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려고 했던 아버지. 그러나 사업에 실패하고 가계를 이끌 능력을 잃어버린 아버지. 그 아버지는 잎이 떨어지고, 가지는 앙상하고,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구부러진 그런 나무와 같은 존재였다.
박수근의 작품에 나타난 나무는 그러나 삶의 의지처로, 세파의 무게를 지탱하는 버팀목으로서 존재하기를 여전히 희망하는 듯하다.
어느 순간, 그 아버지는 바로 현재 자신의 모습인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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